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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 박남식 김남희씨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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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한반도 땅끝으로, 티베트로 홀로 여행을 떠나 열린 세상을 만나고 돌아온 박남식씨(右)와 김남희씨. 멀리 떠나가는 기차가 보는 이의 가슴까지 설레게 한다. 신동연 기자

50대 이상 주부들 사이에서 유행한 우스개 하나.아내가 국을 끓이면 퇴직한 남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왜냐고? 국 솥이 작으면 아내가 3박4일의 국내여행을,국 솥이 크면 열흘 이상의 해외여행을 가기 때문이라는 것.남편이나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또는 여자끼리 떠나는 여행은 중년 여성 사이에서 일종의 문화 현상이 돼버렸다.

홀로 길을 나선 젊은 여성의 모습도 여행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요즘 풍경이다.한비야의 ‘바람의 딸’ 신드롬일까? 구속을 거부하는 통쾌한 일탈일까? 혼자서 긴 여행을 마친 뒤 여행기를 책으로 펴낸 여성들이 최근 부쩍 많아졌다.박남식(58)씨는 지난 1999년 9월부터 8개월간 티베트와 네팔·인도를 여행한 뒤 얼마 전 『나비의 티베트 여행』(아침미디어)이란 책을 출간했다.

또 김남희(35)씨의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미래 M&B)은 지난 2001년 6~7월 해남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국토를 종단한 여행기. 2003년 가을에 떠난 흙길 여행기와 함께 최근 한 권의 책으로 묶여나왔다. 박씨와 김씨가 만나 여성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를 나눴다.

▶김남희=책 표지에 '여자 나이 쉰셋! 1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리라!'라고 적으셨더군요. 식구들이 눈에 밟혔을 텐데요?(웃음)

▶박남식=약 30년간 생활요가를 보급하고 십수년간 여성단체 활동도 하느라 지쳐 있었어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돈까지 모아주며 등을 떠밀더라고요. 마침 아들을 국가(군대)에 하숙시켜 뒀고 남편도 외국에 가게 돼 홀가분했죠.

▶김=전 사실 사회에 별 공헌한 것도 없지만…. 다만 여자로 살아가면서 제약을 많이 느꼈고 거기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여행이었지요.

▶박=걸어서 종단했다니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무서웠을 텐데….

▶김=울기도 많이 울고…. 문고리도 없는 마을회관에서 양말까지 신고 맥가이버 칼과 손전등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가 바람소리에 벌떡 일어난 적도 있고, 어스름 저녁에 길을 잃어 119구급대가 출동한 적도 있어요(웃음) .여행을 하는 한 공포는 끌고 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여행을 통해 내 맘 속의 두려움과 불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 소통하면 얼마나 기쁜데요.

▶박=나이 때문인지 두려움보다 불편할 때가 있었지요. 인도에서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가방을 들고 화장실을 가야 할지 버스에 두고 가도 될지 좀 고민했죠(웃음). 내가 상대방을 두려워할 때 상대편도 그렇게 반응한다고 생각해요.

▶김=혼자 떠났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어요. 물집이 생긴 발을 끌고 절뚝거리면 쉬었다 가라고 감자를 쪄주는 노부부, 남편을 부엌방으로 밀어내고 곁에 재워준 아주머니, 게다가 풀섶에서 튀어나오는 벌레까지.

▶박=고산병에 시달리고 먹을 것이 달라 고통스러웠지요. 해발 3500m 이상이면 국수도 잘 삶아지지 않아요. 푸르르 설끓어 넘치는 국수를 제대로 퍼지게 하기 위해 찬물을 부으며 새삼 인내심을 배우지요.

▶김=한창 아이 키우느라 씨름하는 친구들이 "너만은 자유롭게 살고 세상얘기 들려달라"며 부러움과 성원을 함께 보내줬어요.

▶박=내 여행일기를 본 뒤 감동받아 자신도 떠난다는 남녀도 몇명 있고 전업주부 친구들은 다음엔 꼭 같이 가자고 다짐까지 했지요.

▶김=밥집을 하는 언니 두명과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이렇게 편한 밥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가족여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고스란히 집안일을 갖고 간다는 거죠. 여자들이 홀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요?

▶박=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도 이유일 테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와 불만이 많다는 뜻도 되겠죠.

▶김=저처럼 여행하면 돈도 얼마 들지 않아요. 잡지 원고료로 충분했으니까요. 지난해 시작한 세계여행도 대중교통과 걷기만으로 하고 있는데 중국으로 갈 때 7만7000원짜리 배를 이용하면 1년 동안 500만원으로 버티죠.

▶박=나도 티베트 여행에서 비행기 요금을 포함해 6개월에 400만원밖에 안 들었어요.

▶김=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포기하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쯤은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지요.

▶박=세상은 공평해 하나를 취하려면 다른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일상을 버리면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의 소중함을 가슴 깊게 느끼게 되지요.

정리=문경란 여성전문기자 <moonk21@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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