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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2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25) 사랑이 싹트다

아무튼 어렵게 성사된 '요검' 의 촬영은 산넘어 산이었다.

채령의 미숙한 연기가 큰 문제였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아 눈을 깜빡거리거나 사극이란 사실을 잊고 현대적인 몸짓을 취하는 등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실수들이 빈번했다.

TV탤런트라고는 했지만 아직 연수중인 신예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혹독하게 연기지도를 했다.

야단도 많이 쳤던 기억이 난다.

그날 촬영분을 마쳤어도 곧바로 보내지 않고 남아서 다음 신을 공부하도록 독려했다.

기필코 좋은 연기자를 만들겠다는 각오였다.

내가 이처럼 열의를 보인 것은, 채령에 대한 나도 모를 호감이 그때부터 싹튼 때문이 아닌가 한다.

채령의 부모님은 무척 완고한 분이셨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당시 채령은 연기자가 됐다는 사실조차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됐다.

전북 고창의 선운사에서 촬영할 때였는 데, 신인배우가 영화 촬영중이라는 기사가 한 지방신문에 났던 모양이다.

마침 광주에 사는 부모님이 이 기사를 우연히 읽고 촬영장으로 달려왔다.

나는 일단 채령을 숨겨놓고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를 믿어 주십시요. 훌륭한 연기자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 감독이란 사람이 나와 점잖게 나서 말씀을 드리니까 채령의 부모님은 일단 흥분을 가라앉혔다.

믿을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던지 채령의 부모님은 "이왕에 그렇게 됐으니 감독만 믿겠다" 고 당부하며 그날 스태프들에게 술까지 샀다.

채령과 첫 촬영에 얽힌 에피소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촬영 첫날로 기억된다.

고창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 촬영 스케줄을 점검하고 있는데 밖에서 기별이 왔다.

여관방을 둘러본 채령이 "도저히 이렇게 지저분한 방에서는 잘 수 없다" 고 떼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불이나케 나가보니 채령이 여관 마루에 걸터 앉아 시무룩해 있었다.

나는 그런 채령을 보고 냅다 호통을 쳤다.

"너보다 수십년씩 한 배우들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지내고 있어. " 워낙 귀엽게 자라다 보니 영화배우 하면 대단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촬영이 끝나고 채령은 화장독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

'요검' 을 다 찍고나서 나는 잠시 채령을 잊고 지냈다.

다행히 영화는 흥행에 성공, 채령의 인기는 올랐지만 작품이 끝났으니 우리의 관계도 끝이었다.

그렇게 두세달이 지난 뒤 나는 충무로에서 우연히 채령을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갔고 '대추격' '내일 또 내일' '저 파도위에 엄마 얼굴이' 등 몇편을 더 찍을 수 있었다.

70년대 초중반 채령은 영화배우보다 CF모델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74년 무렵 청량음료 '오란씨' 의 광고모델을 한 것을 비롯, 의상모델로 활동하면서 '샘플의 여왕' 이라는 찬사를 듣곤 했다.

당시로서는 최고 대우를 받는 톱클래스의 모델이었다.

감독과 배우 혹은 스승과 제자처럼 지내던 우리가 이성으로 다가서기 시작한 것은 76년 무렵이었다.

나는 많은 나이차 때문에 연인 사이로 발전되는 게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그때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 며 거짓말도 해 보았지만, 이미 깊어진 정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후 나는 채령과 함께 광주로 내려가 결혼 의사를 알리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자리를 피한 아버지 대신 끝내 어머니의 반승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채령과 나는 첫 만남이후 8년만에 백년 가약을 맺었다.

79년 3월의 일이다.

이때 나는 마흔세살의 노총각, 채령은 스물여덟의 과년한 처녀였다.

우리는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충남 아산의 도고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당시 '신궁' 이란 작품을 준비하느라 일을 달고가 제대로 허니문을 즐기지 못한 것이다.

별로 자상하지도 못한 남편. 나는 영화밖에 모르고 산 사람이다.

그래도 불평 한번 안 하고 지금까지도 그 어려운 '감독의 아내' 로서 묵묵히 내조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결혼 이듬해에 장남 동준 (동국대 연극영화과 1학년 재학 중) 을 낳고, 82년에 둘째 아들 동재를 보았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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