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2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4) 내 아내 채혜숙

내 마지막 사극액션물로 불리는 우진필름의 '삼국대협' (72년)에는 일지매가 등장한다.

임진왜란후 왜적 구로다에게 강탈당한 국보 (國寶) 청룡검을 찾기위해 비월검법의 명인 일지매가 일본으로 건너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끝에 청룡검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홍콩영화의 '외팔이' 시리즈와 같은 검객물을 흉내낸 영화가 더러 있었다.

그러니 수준이야 별게 아니었다.

나는 한국적인 무예를 그리기에 역부족이었던 당시의 여건과 힘의 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해보고 싶었다.

조명을 적극 활용한 실내 액션장면 등 새로운 시도가 괜찮아 보였는지 영화는 흥행면에서 꽤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이 작품의 주인공 일지매 역은 김희라였다.

그는 50.60년대 명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김승호 (69년 작고) 씨의 아들이다.

나는 김희라를 '비내리는 고모령' (68년) 를 통해 데뷔시켰다.

외모도 준수하고 의욕이 넘쳐 보인데다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 는 뜻을 이미 아버지한테서 들었던 터라 쉽게 영화판으로 그를 끌어낼 수 있었다.

얼마나 배우가 되고 싶었든지 김희라는 보다 잘 생겨보이려고 쌍꺼풀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어쨌든 데뷔이후 김희라는 내 영화의 단골배우가 됐다.

'이슬맞은 백일홍' '비 내리는 선창가' '비검' '증언' '신궁' '짝코' 등등. 그러나 인연으로 치면 이 보다 더한 숙명이 70년대 초반 내 곁에 찾아왔다.

몇년 뒤 아내가 된 채혜숙 (蔡蕙淑) 을 처음 만난 것이 이때다.

'검' 자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요검' (71년) 이 오작교 노릇을 했다.

때는 '요검' 을 찍기 얼마전. 어느날 강대창이라는 영화제작자가 "괜찮은 연기자를 추천하겠다" 며 나를 찾아와 인사를 시켰다.

동그란 얼굴에 한국적인 미인상이란 인상을 받았지만 어떤 작품에 꼭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워낙 신인들이 넘쳐나는 영화판에서 유별난 경우가 아니고서야 이런 만남은 감독과 신인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상식이었다.

더구나 35살의 노총각이 될 때까지 나는 여자하고는 담을 쌓고 산 '쑥맥' 이었다.

그저 영화에만 미쳐 변변히 연애 한번 못해보고 그 좋은 청춘을 날린 게 나였다.

예쁜 여배우와 염문이 많을 법한 감독이란 사람이 그정도였으니 남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게 뻔하다.

아무튼 채혜숙은 '요검' 으로 은막에 데뷔했다.

광주 출신으로 광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대 2학년에 재학중인, 방년 20세였다.

이미 대학입학전 입시준비를 하면서 탤런트로 뽑혀 교사의 꿈을 접고 배우가 돼 있었다.

그때 채혜숙과 함께 MBC 탤런트 3기로 선발돼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연기자로는 김영애.김수미씨가 있다.

당시 나를 만날 때 채혜숙은 탤런트 연수중이었다.

마침 드라마에 단역 출연한 그를 본 제작자가 내게 추천했다.

우선 나는 '요검' 의 내용을 대충 설명해 주고 의향을 물었다.

'요검' 은 후삼국시대 백제를 재건하려는 유장 충일과 그의 딸 요화, 약혼자 달지가 황금불상을 되찾기 위해 적들과 벌이는 일대 격돌을 그린 비련의 역사멜로물.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대본을 읽어본 채혜숙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고 잘라 말했다. 그 당돌함에 어이가 없었다.

알고보니 시나리오상에 불만족스런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야기의 종반부 약혼자와 포옹하는 장면이 있었는 데,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시집 안간 처녀가 낯선 남자와 포옹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고집을 부렸다.

워낙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제작자가 "포옹 장면을 빼겠다" 는 중재안을 내자 채혜숙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출연이 결정되자마자 혜숙이란 이름부터 바꿨다.

혜숙이란 이름은 너무 흔한 것 같아 동글동글 방울처럼 예쁘다는 뜻의 방울 '령 (玲)' 자를 옥편에서 찾아 내 그에게 '채령' 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글= 임권택 감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