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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2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3) '독창성은 내고집'

지난 22회 '액션영화와의 결별' (4월 9일자) 내용을 보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 들어있어 깜짝 놀랐다.

잘못된 곳은 내가 일본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보고 받은 영향을 '검' 3부작에 실험했다고 한 부분이다.

액션영화든 뭐든 한국의 정서가 배어있는 독창성을 내 영화정신의 생명으로 삼고있는 데 내가 일본 영화감독의 영향을 받아 작업했다니. 이를 읽고 오해할 독자들을 생각하니 어이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알아봤더니 담당기자가 내 글에다가 잘못된 자료를 첨가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내가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 등 일본 영화를 처음 본 시점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로, 70년을 전후로 '검' 3부작을 만들던 시절과는 10년 정도 시차가 있다.

'영향' 운운이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근거다.

(이런 잘못된 기사가 나가게 된 것은, 임감독이 이달말 크랭크인하는 '춘향뎐' 의 촬영지를 돌아보기 위해 지난주 전북 남원에 머무르는 바람에 기자가 불충분한 기존 자료를 참고.편집하는 과정에서 임감독에게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다. 임감독과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 편집자)

내가 '검' 3부작을 만들던 때는 일본영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몇몇 시나리오 작가나 제작자가 간혹 일본 영화의 대본을 구해 읽어보던 수준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에겐 그런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서 지난 22회에 언급된 이야기, 즉 '검' 3부작중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비검' 과 '요검' 이 일본영화를 각색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내 독창적 아이디어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내가 일본영화를 처음 본 것은 79년의 일로 기억된다.

78년 나는 '족보' 로 제17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는 데, 이에 대한 보너스로 이듬해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정일성 촬영감독과의 동행이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중 잠시 일본에 들렀을 때 나와 정감독은 구로사와 감독의 '라쇼몽 (羅生門)' 등 일본영화 몇편을 처음 봤다.

그로부터 2년 뒤인 81년. '족보' 와 '만다라' 등 몇편이 일본 도쿄의 '스타지오200' 극장에서 집중 상영될 기회가 있어 나는 다시 일본을 찾았다.

그런데 이때 내 작품을 본 일본의 평론가들 사이에서 흥미있는 이야기가 도는 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내 영화가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작품과 유사점이 많다' 는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미조구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지만, 나하고 같은 취향의 감독이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의 평론가 사토 타다오 (佐藤忠男.현재 일본영화학교 교장) 씨에게 부탁, 일본국제교류기금 시사실에서 미조구치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우게츠 이야기 (雨月物語)' 와 '서학일대녀 (西鶴一代女)' 등을 보았다.

"50년대에 벌써 이처럼 대단한 작품을 만들다니" , 나는 감탄했다.

그 이후 나는 내 작품이 미조구치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유럽쪽에서도 들었다.

그때 이런 사실을 안 사토씨가 내 작품과 미조구치의 작품을 비교.분석하는 평론을 썼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정서감은 비슷하지만, 필름 (영화) 으로서의 유사성은 없다" 고 결론을 냈다.

'미조구치로부터 영향'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가 직접 입증해준 셈이다.

구로사와의 후기작품인 '란 (亂)' 도 85년 '길소뜸' 이 하와이영화제에 초청돼 갔을 때, 그 곳에서 처음 봤다.

나는 영화인생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온 지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국적인 정서와 개성이 깊이 배어있는 독창적인 작품, 할리우드나 일본영화 등과 차별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목표점을 향한 발걸음엔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지만, 그 올바른 정신만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22회에 소개된 잘못된 내용으로 인해 자칫 내 영화인생에 대한 곡해가 있지 않기를 바란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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