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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 칼럼] 광고에 시선 뺏긴 특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는 이 '옴부즈맨' 칼럼을 맡으면서 전보다는, 그리고 근 10종의 다른 신문들보다는 중앙일보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러기를 근 한 달 동안 하면서 들게 된 중앙일보의 편집과 관련한 아쉬움 몇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한나라당 서상목 (徐相穆)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다음날인 4월 8일자 중앙일보는 두 여당 수뇌부의 '심각한' 표정 한 컷을 1면에 실었다.

그런데 다른 몇몇 신문들처럼 '환호와 침울이 교차' 하는 여와 야의 사진을 실어 대조시켰더라면, 4면의 '野 야호/與 오호' 의 재치있는 제목 이상의 시각적인 효과를 얻어냈을 것이다.

하루치 신문에는 인물 사진을 제외하고도 20여장의 사진이 게재되는데, 중앙일보는 이 사진 설명문의 제목을 붙이는 일에 의외로 인색하다.

사진을 초점화해줄 캡션이 없기 때문에 그 모양이 보도든 정경이든 눈을 그려넣지 않은 용 그림처럼 맥이 풀린다.

사진이 일으킬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배려해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독립 사진은 사진 위에 제목을 달고 있지만, 기사관련 사진은 제목이 없어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기가 힘들다.

중앙일보는 하루 44면의 지면들을 분야별로 나눠 표제를 붙이는데 그중 유독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 면만은 영문으로 'ON TV' 로 돼 있다.

나는 굳이 한글 전용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 면만 영자로 표기하는 그 일관성의 부족에 아쉬움을 느낀다.

한글로 '온 티비' 라 쓰면 독자들이 무슨 말인지 쉽게 짐작되지 않아서라면 그 제목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는 기사 제목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거나 괄호 속으로 처리할 때 (가령 지난 2일자의 김성호 칼럼 제목 '朴燕巖, 서질 (鼠叱) 을 쓰다' 와 같은 경우) 더러 나타나는 어색함에도 해당되는데, 지면의 보기 좋은 모양새를 위한 편집자들의 연구가 필요할 듯 싶다.

지난 주의 중앙일보 보도에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긴 기사는 지난 5일자 '제3의 길을 찾을 때' 라는 토론회 보도였다.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 으로 공동 개최한 이 심포지엄은 두 주제의 요약과 토론 내용으로 잘 정리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체제를 찾는 이 특집의 중요성은 그러나 면 구성의 실패로 그 효과가 반감당했다.

한 면을 세로로 반을 갈라 다른 반쪽 면에 실린 '기획광고' 가 이 기사를 압도해버린 것이다.

이날의 맥도날도 광고는 기사와 함께 사진.도표.그래픽으로 본면보다 더 화려하게 구성돼 '새 천년을 준비' 하는 의미있는 특집으로부터 독자의 시선을 빼앗아 버렸다.

기획광고가 이런 형태로 본지의 권위를 위축시킨다면 그 처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중앙일보가 김석환 기자를 마케도니아 블라체에 특파, 코소보 난민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현지 취재해 독자적으로 보도한 점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신문들은 나이지리아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청소년축구 경기에는 특파원들을 경쟁적으로 파견하면서 세기말의 가장 거대한 비극인 유고사태에 대해서는 왜 '외신종합' 이나 워싱턴.파리의 책상에서만 기사를 정리하는가.

위험하고 혹은 특파 절차가 복잡해서인가.

어떻든 김석환 기자의 '과연 神은 있는가' 하는 난민의 절규를 처절하게 전달하는 르포는 책상 앞에서 쓴 어떤 기사들보다 현장감 넘치는 박력있는 기사였다.

7일의 '신문의 날' 은 신문들이 창간기념일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날인데, 중앙일보도 다른 대부분의 신문들처럼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설가 최인호씨가 이 지면을 통해 "읽는 신문으로부터 보는 신문으로" 의 신문의 타락을 지적하며 "소금의 짠맛 대신 설탕의 역할만" 하고 있는 한국의 신문들을 "신문이여, 너마저" 라는 제목으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는 아무런 유보없이 최인호씨의 이 비판에 동의하면서 한국의 신문들이 이 신랄한 지적을 실천적인 반성의 자료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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