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칼럼] 사외정치는 이렇게 해라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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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임원치고 정치인들로부터 이런 요청을 안 받아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임원인데 이런 요청을 안 받아봤다면? 유감스럽게도 귀하가 다니는 회사는 경제적 사회적 존재감이 별로 없는 기업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들과 알고 지내게 되는 계기 또는 채널은 다양하다. 친인척 곧 혈연으로, 동창 곧 학연으로, 동향 곧 지연으로 이래저래 만나거나, 업무와 관련해 또는 친목모임과 관련해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 출몰하는 걸까?

물론 여러분이 필요해서 먼저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일감을 따는데 필요해서, 관가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필요해서 etc. 대기업에는 아주 로비스트급으로 이 일만 전담하는 임원들도 없지 않다. 하루 종일 일 년 열두 달 국회주변을 맴돌면서 정치인과 보좌진 관리만 하는 자들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전담하지 않는 임원 또는 회사에 그런 대응 시스템이 없는 기업 임원의 경우에는, 처음 정치인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이런저런 계산으로 머리에 쥐가 나기 마련이다.

#조언 1 : 도와달라는 말은 버릇이다!

H이사는 고민 끝에 결국 부사장과 상의를 했다. 정치권 여당 실세 라인은 물론 청와대하고도 끈이 좋다는 부사장이 내린 해법은 이랬다. ‘그 선수(그 국회의원을 말한다), 야당 출신 재선에 당 대표 라인도 아니고, 또 워낙 색깔이 분명해서 지금은 당내에서도 소수파 신세인데,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명색이 정무위원회 위원이고 또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원을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꼬리를 흐려보았지만, 부사장은 간단히 ‘킬’ 시키고 말았다. 역시 실세 라인과 가까운 사람은 달라! 그날 이후 H이사는 그 국회의원의 말에 더 이상 괘념치 않기로 했다. 잠도 잘 잤고.

#조언 2 : 꺼진 불도 다시 보자!

그러나 인연이란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뒤, ‘자본시장과금융투자업에관한법률’, 이른바 자통법 개정이 증권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대두했고, 그 개정 작업의 중심에 야당의 그 국회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야당 간사! H이사는 증권업계 통합 자통법 대응 T/F 팀장!

이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날의 그 만남 이후,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전화를 받지도 않았건만, 이렇게 다시 만나야만 하는 운명이라니! 회사를 원망하고, 국회를 원망해 봐도 소용없는 일. 이제는 그를 만나야 한다.

조심스레 전화를 들어 그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ㅇㅇㅇ의원님 전홥니다. 몇차례 의원님이 통화를 원한다고 전화를 걸어왔던 그 비서관 목소리다. ’아~예, D증권 H이삽니다. 의원님과 통화 가능할까요?‘ ’잠시 기다려보시죠‘ 잠시 뒤~. ’의원님이 지금 말씀 중이라서요. 제가 여쭤보고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예~‘

그로부터 며칠 뒤. 그 비서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저~ 혹시, 자통법 개정과 관련해서 연락을 주신 건가요?’ ‘네~, 뭐 그냥 설명드릴 것도 있고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부탁이요? 청탁하실 게 있으신가보죠?’ ‘네~ 이를테면...’ ‘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조언 3 : 민원과 청탁을 구분하라!

결국 H이사는 ‘무조건 방문’을 시도했다. 위에서는 쪼고, 뭔가 결과는 내야하고, 그 국회의원이 지금은 우리의 최대 걸림돌이고.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의원실을 방문했는데, 뜻밖에도 환대를? 비서관도 일정을 못 잡아줘서 미안하단 말을 연발하고, 마침 방에 있던 그 국회의원도 ‘나를 알아보고!’ 차까지 대접하는 것 아닌가?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충분히 하고 나왔고, 회사에 돌아와서는 얼굴까지 섰다.

그러나 역~쉬 국회에서는 다수 여당의 힘이 짱인지라. 법안은 생각보다 싱겁게, 그 국회의원에게 뭔가를 해줄 틈도 없이, 통과되었고, H이사로서는 거의 손 안대고 코푼 격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뭘 좀 도와줘 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에이~ 다 끝난 마당에. 그냥 손을 털고 말았다.

#조언 4 :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면 끝까지!

특히 ‘꺼진 불’ 신세일 때, 당신이 낸 후원금은 ‘영양가가 매우 높다.’ 당연히 효과도 좋다. 일단 시작을 했다면 꾸준하게 길게 도와주기 바란다. 그러면 언젠가는 청탁을 하지 않아도 민원을 해결해주려 들 것이다.

박연차 회장은 이런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방위로 뿌렸고, 전방위로 거뒀다. 하지만 뿌려도 너무 뿌린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개나 소나 먹다보니, 누구나 그의 돈을 먹는 것을 당연시했고, 결국 그로서는 비용 대비 효과의 범주를 넘어, 본전 생각이 간절하게 나는 상황으로까지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마구 불고 싶을 정도로.

기업을 하려다 보면, 사외정치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수위’다. 교도소 담장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또 주고도 코가 꿰지 않을 만큼. 그 수위에 관해서는 속편을 기대하기 바란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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