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6. 지곡서당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마석에서 축령산 쪽으로 10킬로미터 쯤 들어가다보면 수려한 경관 속에 왼편으로 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라는 현판이 붙은 한옥 건물이 나온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바로 '지곡서당' 이다.

지곡 (芝谷) 은 '지둔리 (芝屯里) 골짜기' 에서 따왔다.

이곳 지곡서당이 바로 청명 (靑溟) 임창순 (任昌淳.85) 옹이 20년째 머무르며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군자삼락 (君子三樂)' 의 일락을 즐기는 곳이다.

4천6백여평 산자락에 세워진 지곡서당에선 오늘도 '논어' '맹자' 등 고전을 암송하는 소리들이 낭낭하게 들려온다.

이른바 지곡서당파 문하생들이다.

79년부터 이곳을 거쳐 나간 사람들은 무려 1백30여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전국 각 대학과 정부기록보존소.호암미술관 등 한국학 관련 기관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소장파 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이 서당을 주목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지곡서당파의 태동은 4.19교수단 시위 주동 등을 이유로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직을 박탈당한 任옹에게 한학강좌를 개설하자고 부추겨 태동고전연구회를 창립한 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균관대 재직 시절의 任옹에게 한학을 배우던 성대경 (成大慶) 전 성균관대 교수, 강만길 (姜萬吉) 전 고려대 교수 또래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任옹의 학문적 깊이에 매료되어 있던 사람들로 김정배 (金貞培) 고려대 총장, 조동일 (趙東一) 서울대 교수, 배상현 (裵相賢) 동국대 교수 등도 그들중 주요 멤버다.

79년 현재의 지곡서당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서울의 수표동.당주동 등지로 옮겨다니며 任옹에게 한학을 수강한 사람은 5천여명에 이른다.

서울시절 2년 이상 수강한 제자들 가운데는 박용운 (朴龍雲) 고려대 교수, 김용구 (金容九) 서울대 교수, 은정희 (殷貞姬) 서울교대 교수 , 강경숙 (姜敬淑) 충북대 교수 등 한국사. 동양철학. 고고미술사학과 같은 한국학 및 동양학 전공학문에 두루 걸쳐있다.

정치학을 전공했던 최순희 (崔淳姬) 씨는 任옹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전공을 바꿔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의 지둔리에서 지곡서당의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76년이다.

이때부터 일반인에 대한 한문교육을 폐지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 崔鍾賢) 의 지원을 받아 매년 5~6명씩 한문장학생을 모집하며 오늘에 이르른다.

이광호 (李光虎) 한림대 교수, 성태용 (成泰鏞) 건국대 교수 등 5명이 1기생으로 지곡서당의 당당한 출범을 알렸다.

81년 9월,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이 끊어지며, 재정적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任옹은 한학을 가르치겠다는 열정 하나로 가르침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일정한 수입도 없이 任옹은 연수원 (硏修員)에 대한 생활보조비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현재 '서당지기' 김만일 (金萬鎰) 교수는 "5만원의 장학금 봉투에는 가계수표도 있고,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천원짜리가 섞여 있었다" 며 "任선생은 빚을 지면서도 장학금만큼은 한번도 걸르지 않았다" 고 궁핍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84년에는 초기 졸업생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연구논문집 '태동고전연구' 를 창간함으로써 학계에 한학 연수생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태동고전연구' 는 지난 해까지 매년 1권씩 15호까지 나오며,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다져온 지곡서당파의 연구성과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任옹은 서당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자 남은 사재와 함께 서당을 85년 한림대에 넘기면서 태동고전연구소장직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곡서당파 인사들에게는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는 점 외에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곳 출신 나름의 '현실참여' 다.

"당시 시대적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任선생의 삶이 그러했고, 또 그분은 늘 우리에게 민족과 현실에 대해 책임을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고 이곳 2기 졸업생이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인 유초하 (柳初夏) 충북대 교수는 말한다.

진보적 역사학자들의 모임인 구로역사연구소 (현 역사학연구소) 의 소장을 지낸 바 있는 경기문화재단 윤한택 (尹漢宅) 연구원도 "외래 문화의 충격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현실에서 선생님의 우리 뿌리 찾기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한학 교육은 연수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며 "지곡서당 출신들의 현실 참여는 우리 문화를 바르게 지키려는 청명선생의 가르침이 바탕이 된 것" 이라고 말한다.

언제부턴가 대학교수들이 내는 각종 성명서의 연대서명란에 지곡서당파 인사들이 빼곡이 들어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학을 공부하는 게 결코 현실을 외면하고 은둔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찾고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초를 닦는 일임을 증거하는 대목이다.

"내가 봐도 뜻밖일 때가 많았지. 서당에 있는 동안에는 무척 소극적이었다 싶은 사람도 어느 날 우리 사회를 향해 성명서를 내는 데는 적극 동참하더군. 지곡서당 출신이라면 겨우 한문원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이게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 기초가 되고 이땅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일구는 데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

任옹은 우리의 뿌리를 소중하게 가꾸려는 노력들이 결국 현실에 대해 강한 참여를 유발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격동의 60년대 이후 "뿌리를 바로 알아야 역사와 현실에 대응할 수 있다" 고 믿는 청명이란 한 인물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모여 지둔리 골짜기에서 벌인 일은 외래바람으로 척박해진 우리 지성계를 갈아엎고 민족과 현실을 건강하게 하는 문화의 뿌리찾기 작업이었다.

그것은 스러져가는 전통에 대한 강인한 부활작업이기도 했다.

오늘도 1백30명이 넘는 지곡서당파들은 전국에 '또다른 지곡서당' 을 차리고 씨뿌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고규홍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