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8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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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⑭

"알아요 선배. 비둘기 아닌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는 비둘기가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걸 건드리고 있다는 걸 잘 아실 텐데, 왜 딴청만 피우고 있어요?"

"그것도 알 만해. 삶의 회의를 느낄 때도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사람이 아니라 돌멩이일 뿐이지. 하지만 지금은 근본적인 것, 회의 같은 것 무조건 접어두고 미친 놈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아랑곳 않고 뛰어야할 시간이야. 쓸개도 자존심도 회의까지도 잠시 시험관 알콜 속에 보관했다고 생각하고 핏기 있는 두 다리만 가졌다고 생각해. 우린 도둑이야. 지금의 우리는 도둑이란 생각만 가지자구.

뭐였더라, 어떤 책에서 본 건데 기억에 삼삼하네…. 도둑놈들이 지키는 칠계명이란 게 있었어. 도둑놈들에게도 배울 수 있는 일곱 가지 계명이 있다는 얘기였는데….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닥친 일을 하룻밤에 끝장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다시 도전한다. 그는 작은 일에도 목숨을 건다. 그는 아주 값진 물건에도 애착을 가지지 않고 몇 푼의 돈과 바꿀 줄 안다.

그는 시련과 위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낸다.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벌이는 일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개 그런 내용들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대목이 있어서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게 틀림없는데, 정말 반추해볼 가치가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들 안 해? 게다가 태호는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시큰둥해서 까탈을 부리나?"

"조금 전에 나한테도 생각이 있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을 하려는 거였어요?" "아냐. 절대로 아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결코 시시한 게 아냐. 우리 모두의 꿈이라할까…. 씨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해서도 안돼. 그것도 참고 있어야 돼. 그냥 도둑놈들 칠계명을 받들어 모시며 살아보자구. 지금은 그런 때야, 태호 알겠어?" 승희가 수건을 벗겨 태호에게 건네주는 것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철규는 벽을 기대고 누웠다.

꼬장꼬장한 모습으로 앉아 견디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온 삭신이 땅 속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형식이는 잽싸게 베개를 찾아 그의 뒷덜미를 받쳐주었다. 벽을 기대고 쓰러진 철규는 금방 코를 골았다. 둥근 밥상 위에는 아직도 소주 한 병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눈 가장자리가 벌겋게 상기된 태호가 병을 당겨 뚜껑을 땄다. 그는 승희의 빈잔에다 술을 따라주며 퉁퉁 부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미안해요. 선배 말씀대로 정말 봄을 타는 건지 까닭도 없이 타관바람을 타는 건지…. 우리의 유랑생활이 언제 끝장을 보게될 것인지 누나는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러나 누나는 그때가 되어도 갈 곳이 있잖아요. 난 이게 뭐예요.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그런 고생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머리에 서리가 내린 후까지도 주막집 강아지처럼 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문밖에서만 서성거려야 하잖아요. "

"문 밖이든 문 안이든 우린 언제나 동행이 있잖아. 창 밖이라면 나처럼 몸과 마음이 헐벗은 여자도 있을까? 무슨 소린지 잘 알고 있지? 난 이제 한선생님이 무섭기까지 해. 그런데도 난 잘도 견디고 있잖아. 이해는 하지만 그런 뚱딴지 같은 소리 다시는 하지마. " 이제 매화가 피어날 시절인데도 쌍계사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는 매서운 소리를 질러댔다.

밥상을 치우다말고 승희는 방 문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총총하게 박힌 밤하늘이 허공에 휘장을 친 것처럼 이마 위로 두둥실 떠 있었다.

방안으로 바람이 휘몰아 들었으나 한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제각기 다른 몸짓으로, 그리고 제각기 다른 생각들에 잠겨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벌써 폭설처럼 내리는 매화꽃 길을 따라 하동 장터로 내려가는 꿈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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