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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외규장각 도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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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2면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 궁중에 규장각 (奎章閣) 을 설치했으나 이 곳에 비치된 전적 (典籍) 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1781년 강화 사고 (史庫)에 별고를 지어 외규장각 (外奎章閣) 이라 부르고 일부 도서를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

1866년 병인양요 (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가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갔으며 그것들이 현재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이른바 '외규장각도서' 들이다. 총 3백40책 중 조선조의 의궤 (儀軌)가 2백97책으로 주종을 이룬다.

'의궤' 란 말뜻은 '본보기' 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이를 관장하는 도감 (都監) 을 설치하고 행사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도감의궤를 만들었다. 이 기록은 추후 유사 행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의궤의 명칭은 왕실 혼례 때의 '가례도감의궤 (嘉禮都監儀軌)' , 세자책봉 때의 '책례도감의궤 (冊禮都監儀軌)' 등 다양하다.

이들 의궤는 필사본으로 돼있으며 경우에 따라 다양한 그림이 있는 것도 있다. 같은 내용의 의궤를 왕이 보는 어람 (御覽) 용과 의정부.예조 비치용, 그리고 전국 네 군데 사고 비치용 등 여러 부를 만들었다. 어람용은 장정.종이.글씨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본과 차별을 두었다.

겉장은 구름무늬가 있는 녹색 비단으로 하고 최고급 종이에 붉은 색 줄을 치고 반듯한 해서로 글씨를 썼다.

외규장각 의궤는 어람용이 대부분이며 다른 본들은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과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에 분산돼 있다. 파리에는 1630년부터 1849년까지의 의궤가 있고 국내에 전혀 없는 것들도 38건 있다.

의궤기록은 군신간의 의사결정과정, 궁중행사의 상세한 의례절차, 소요 물품, 화가를 비롯한 수십 종의 장인과 그들의 이름, 물품 제작의 역할분담, 포상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성미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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