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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쇼]이창동.오정완의 '스타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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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박하사탕' 과 '봄' 이 만났다. 지난 31일 저녁 서울 청담동의 영화제작사 '봄' .오는 15일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박하사탕' 의 이창동 (45) 감독과 봄의 주인이자 지난해 '정사' 를 히트시키면서 여성 영화프로듀서로서 신물결을 이끌고 있는 오정완 (35) 씨의 만남. 이날 둘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한국영화계의 '스타시스템' 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이감독은 데뷔작 '초록물고기' (97년)에 이어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들꽃같은 무명들을 주인공으로 기용, 이른바 반 (反) 스타시스템을 선언했다. 왜 '앤티' (anti) 인가. 진지한 두 영화인의 고민을 들으며 한국영화에서 스타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지 그 현실속으로 들어가 본다.

◇ 오정완 = 듣자하니 최근 '박하사탕' 의 캐스팅이 완료 된 것으로 압니다. 주역이랄 수 있는 여섯명의 배우가 모두 풋풋한 신인들입니다. 무명인 셈인데, 이처럼 철저히 스타를 배제한 이유가 뭡니까.

◇ 이창동 = 솔직히 말하면, 염두에 두고 있던 스타 (한석규) 를 캐스팅하지 못해 대안 (代案) 을 고려하다보니 반스타시스템을 지향하게 됐습니다. 물론 기획 단계에서부터 한편에는 스타를 쓰지 않고 전혀 새로운 얼굴을 기용하고 싶은 욕망도 컸던 게 사실입니다. 스타 캐스팅의 불발이라는 현실적인 장애물 앞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인 밖에 없었던 거죠.

◇ 오 = 진정한 스타의 가치는 그 희소성에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도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스타는 한정돼 있죠. 단지 우리나라의 경우엔 스타를 재생산해는 구조가 약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몇몇 스타에 대한 의존도가 유난히 높습니다.

◇ 이 = 스타시스템은 영화산업의 핵심요소입니다. 관객은 스타가 연기하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욕망 등을 투사합니다. 오정완씨가 지적한대로, 문제는 한두 스타에 대한 지나친 의존입니다. 한 해 제작되는 40~50편의 국산영화중 대부분이 한두 스타의 몫이죠. 관객이 요구하는 스타의 유형이 다양할 때 우리 영화의 발전이 가능합니다. 지금처럼 TV나 CF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스타의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에 끌어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이제는 누군가 이런 악순환을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자' . '박하사탕' 의 반스타시스템은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 오 = 몇몇 스타를 향한 영화계의 일방적 구애는 한국사회의 관습도 한몫을 한다고 봅니다. 우리 관객은 작품속의 스타 이미지와 자연인으로서 배우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배우 자신도 이런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 이 = 옳은 지적입니다. 어느 스타가 지독한 폭력배 역을 했다거나 파격적인 정사 장면을 찍었다면, 당장 CF의 섭외가 떨어지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영화 속 캐릭터와 실제 이미지에 대한 경계선이 모호하다는 거죠. 이런 사회적 관습을 깨기 위해서는 스타들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경우 멜로 스타의 이미지를 깨기 위해 일부러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다고 합니다.

◇ 오 = 아무튼 이런 관습까지도 거부하는 '박하사탕' 의 반스타시스템 실험은 저에겐 모험으로 비쳐집니다. 흥행의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할텐데요.

◇ 이 = 솔직히 안전장치는 없습니다. 유일한 안정장치라면 작품으로 만족시켜주는 것 뿐입니다. 한국영화에서의 흥행 예상치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스타가 나오면 비디오 판권과 지방 배급업자의 확보가 쉽습니다. 손익계산이 빤합니다. 반스타시스템으로 이런 계산법도 충족시킬 수 없죠. 그래서 '좋은 작품이니 꼭 봐야 한다' 는 정공법을 택한 거죠. 추상적인 얘기지만 관객을 믿는 것, 그게 안전장치입니다.

◇ 오 = 그건 추상적이기보다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한국영화에서도 그런 정공법이 점차 먹히는 추세여서 성공 가능성은 없지 않습니다. 뚜렷한 스타가 없이도 성공한 지난해의 '여고괴담' 이나 '조용한 가족' 등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추세여서 투자자들도 스타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 이 = 그렇습니다. '조용한 가족' 이나 '여고괴담' 처럼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내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때입니다. 지금 비록 '대박' (큰성공) 이 아니더라도 다음 성공을 위해 기다리는 자세, 그게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지름길입니다.

◇ 오 = 스타를 쓰지 않을 경우 기획.제작자는 관객을 찾아가는 방법을 놓고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관객들에게 어떻게 어떤 정보를 줄 것인가 부터 생각해야 하지요. 결국 스타시스템의 대안으로 고려할 만한 게 기획 중심의 저예산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박하사탕' 도 좋은 선례가 되겠죠.

◇ 이 = 실패하기는 싫지만, 실패하더라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겁니다. 비싼 수업료를 낸다고 할까요. 이번에 출연한 배우들도 다음 영화에선 지금보다 더 알려진 배우가 될 테니 그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 오 = 그런 점에서 기존 스타들의 의식이 많이 변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판에서 스타가 된 사람과 이미 TV나 CF에서 스타가 돼 '달동네' (영화판)에 온 연기자 사이에 시각차가 커보입니다. 이런 정서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영화계의 숙제입니다.

◇ 이 = 바로 그런 시각차 때문에 한국영화계는 지금 몇몇 스타에게 끌려가는 형국입니다. 이름 모를 배우도 일단은 '튕겨야' 몸값이 올라가는 줄 알지요. 그런 사람이 스타가 되면, 그 배우에게만 시나리오가 자꾸 몰리니 그때부턴 악순환의 연속이죠. 스타 자체가 치열한 삶의 방식이 되야 할 때입니다.

정리 =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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