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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변동 따라 달력도 양력·음력 뒤바뀐 조선 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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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구한말 음력설을 맞이한 한 대갓집 대문 앞에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눈빛)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을 따라 배우려 했던 이들은 개력(改曆)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천자에게서 책력을 하사받는 반력(頒曆)과 책봉을 부정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서구 열강과 같은 시간체계를 세우는 시간의 문명화를 꿈꿀 수 없었다. “정삭(正朔·책력)을 바꿔 태양력을 쓰되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삼으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중국의 종주권이 부정된 1895년 9월 9일 양력을 쓸 것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졌다. “1896년부터 연호를 세우되 일세일원(一世一元)으로 제정하여 만세자손이 각수(恪守)케 하라.” 양력 시행과 함께 채택된 건양(建陽) 연호는 근대를 향한 꿈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력을 주도한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자, 정부는 국가 기념일과 제사의 택일을 다시 음력을 따르도록 되돌렸다. 결국 이 땅의 사람들은 음력과 양력이 경합하는 독특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설빔 차림의 사진 속 어린이들 뒤에 보이는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건양의 치세에 경사가 많이 있으라)’의 입춘방(立春榜)은 전통과 근대의 시간이 충돌하던 그때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기차는 양반이라 할지라도 시간에 늦으면 기다리지 않는다. 아침 차를 타겠다고 전갈을 보냈어도 오후에 와서 보면 기차는 어김없이 떠났음을 알게 된다. 어떤 대감이 가마를 타고 달려오고 이보다 훨씬 앞서 하인들이 ‘여보! 여보! 가만있소’ 하며 소리치며 뛰어와도 기차는 아랑곳없이 출발 시간에 떠났다.” 알렌의 지적처럼 그때 철도는 학교와 교회와 함께 낯선 규율의 시간을 가르친 ‘위대한 교육자’였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시간의 경쟁에서 졌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해방 직후 김메리가 지은 동요를 부르며 자란 이들은 허비한 근대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바쁘다 바빠’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질주했다. 속도와의 전쟁을 멈추고 느림의 미학을 되찾고 싶은 오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자연에 순응하는 목가적 시간을 노래한 옛 시조가 마음에 다가온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