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나토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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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세르비아 폭격은 정당한 내정간섭이다.

그것이 세르비아의 주권침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국가주권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선동해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해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다.

그는 보스니아에서 20만명을 학살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문명세계가 밀로셰비치의 인간모독을 방관하면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앉아서 학살당하거나 6백년 동안 조상대대로 살아 온 고토 (故土) 를 떠나야 한다.

밀로셰비치는 89년 사회주의가 몰락할 때 동유럽의 다른 공산당수들과 함께 당연히 퇴출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건재한 비결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깃발을 들고 이민족 (異民族) 들을 학대하는 것이다.

그가 나토의 평화안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배경이기도 하다.

나토 연합군은 성공과 실패의 확실한 기준없이 세르비아 공습을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방공망 마비를 겨낭한 제1단계 작전이 끝났지만 밀로셰비치는 요지부동이다.

코소보에 집결한 세르비아 군대를 공격하는 제2단계 폭격이 시작됐지만 성공의 보장이 없다.

나토 연합군에는 마땅한 후속 카드가 없다.

전략가들은 15만명에서 20만명 규모의 나토 지상군이 투입되지 않는 한 밀로셰비치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지상군 투입은 코소보사태를 장기적인 지역분쟁으로 확대시킬 위험이 있고, 그래서 미국과 유럽의 여론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워 실현가능성이 작다는데도 동의한다.

미국과 나토측의 이런 옹색한 입지와는 달리 밀로셰비치는 일단 살판났다.

그는 세르비아 국민에게 세르비아와 나토의 대결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그의 정치적인 반대세력까지 포함한 세르비아 국민이 거의 거국적으로 나토에 대한 그의 저항을 지지한다.

코소보 인구 2백만명의 90%에 해당하는 1백80만명이 알바니아계다.

그들 중 50만명이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같은 이웃나라로 도망갔다.

나토의 공습이 평화를 가져 오지 못한 채 인종청소만 계속되면 밀로셰비치는 결과적으로 코소보를 평정해 세르비아로 편입하게 된다.

나토의 개입으로 그의 목적달성이 좌절되는 게 아니라 앞당겨지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미국과 유럽의 전략적인 딜레마와 도덕적인 갈등이 있다.

클린턴의 말대로 세르비아에 대해 군사행동을 하면 하는 대로, 안하면 안하는 대로 문제가 있고 위험이 따른다.

클린턴은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로부터 보호하는 군사행동은 도덕적 명령이라고 말함으로써 미국이 발칸반도에 전략적인 이익과 함께 도덕적인 이익을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의 공화당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개입에 반대한다.

고질적인 고립주의의 망령이다.

세르비아 공습이 주권침해라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1945년 나치 전범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인류에 대한 범죄는 공소시효 없이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는 경향이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영국에 억류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국가주권과 인권의 충돌에 관한 시비는 주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한 토머스 홉스와 주권을 선택적인 것으로 본 존 로크의 사상적인 대리전쟁 같다.

러시아의 체첸 문제와 중국의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정치 (Realpolitik) 의 입장일 뿐이다.

개입이 가능한 데는 개입하는 것이 힘있는 나라들의 도덕적 의무다.

지금부터의 문제는 나토가 군사행동을 언제 어떤 조건으로 끝낼 것인가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양측이 공습과 인종청소를 즉각 동시에 중지하고 헨리 키신저의 주장대로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게 안되면 남은 카드는 지상군 투입이라는 극약처방뿐이니까.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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