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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7) 화려한 출발

막상 메가폰을 잡고 나니 조감독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감독은 감독의 명령을 받아 단순히 이행하면 됐지만 감독은 그야말로 현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없이는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나이도 어린 신인감독. 어찌보면 연륜있는 배우나 스태프들에겐 배워야할 게 많은 나이였다.

비록 조수시절에 친분을 쌓아놓은 사람들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이 느낌으로 와 닿았다.

그러나 내가 감독인 이상 어쩌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사람들에게 잡히면 내가 망한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연기지도를 하며 연기가 부족하면 수십번씩 반복시켰다.

스태프들에게도 한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도록 꼼꼼히 진행상황을 체크했다.

그랬는데도 촬영현장은 언제나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그때부터 연출이란 게 얼마나 감독의 삶의 깊이와 경험에 따라 편차가 있는가를 서서히 알기 시작했다.

또한 작품에 담고자 했던 것이 이상 (理想) 이라면 촬영한 결과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런 단적인 예가 러브신을 찍을 때였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장면을 든다면 바로 러브신이었다.

정서적 거리감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나는 26살이 될때까지 단 한번의 연애도 해보지 못한 쑥맥이었다.

그 당시 어수선한 시대상황를 고려할 때 그런 일이 어찌 나뿐이었겠냐만, 아무튼 연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신적 여유를 찾지 못한 게 문제였다.

감정은 경험과 상상력의 산물인데 나에겐 그런 경험도 없었고 정서는 전쟁직후의 가난만큼이나 황폐해 있었다.

내 영화의 첫 러브신은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는 선에서 끝냈다.

이때의 충격때문에 이후 내 영화에서 노골적인 러브신을 발견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전투신에 얽힌 일화도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당시 전투장면을 찍는데는 공포탄이란 게 따로 없었다.

군부대나 경찰의 지원을 받아 전부 실탄을 사용했다.

소형대포까지 동원될 지경이었다.

이러니 위험요소를 줄이면서 실감나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치안국 (경찰국) 의 명사수들이 곧잘 동원됐다.

조감독인 정진우도 가끔 거들었다.

그래도 느닷없이 비명소리가 나 살펴보면 출연자들의 옷이 총탄에 찢겨있거나 자잘한 외상을 입는 것은 다반사였다.

지금도 평자들이 이 작품의 명장면처럼 봐주는 게 스키타고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평론가 정성일은 "시각적으로 격렬한 운동감이 넘친다" 고 했다.

그러나 지금와서 나는 그 부분을 자랑할 수 없다.

우선 스키를 타고 어떻게 총을 쏠 수 있을까. 그건 설득력이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것도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찍어댔다.

그 시절 나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어쨌든 데뷔작은 대성공이었다.

그야말로 최대 흥행대목인 설프로로, 그것도 장안에서 제일간다는 국도극장의 스크린에 걸려 8만명 이상을 동원했다.

신인감독을 과감히 기용한 한흥영화사는 다소 '뜻밖의' 성공에 쾌재를 불렀다.

액션영화가 유행이던 당시만해도 영화가 실패할 확률은 지금보다는 훨씬 적었다.

소재만 잘 선택하면 웬만큼 관객들이 봐주었다.

내가 잘 만들었다기 보다는 시대의 유행에 잘 따른 것이 주효했던 것 뿐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영화지만 내 첫 작품은 그런대로 미움을 받지 않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데뷔작의 이런 가당치 않은 성공은 60년대 무지막지한 남작 (濫作) 의 세월을 여는 전주곡일 뿐이었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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