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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1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6) 26살에 메가폰 잡다

영화판 5년만에 찾아온 감독 데뷔. 한창 청춘을 구가하던 내 나이 26살 때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변의 질시를 받을만큼 때이른 데뷔였다.

데뷔작은 '두만강아 잘 있거라' .61년부터 촬영에 들어가 62년 설 (구정) 대목을 노리고 개봉됐다.

돌이켜 보건대 감독 데뷔에는 시운 (時運) 도 적잖이 작용했던 것같다.

50년대 이승만 정권은 각종 세제혜택을 주면서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영화를 통틀어 한해에 1백여편이 제작될 정도로 영화산업이 꽤 융성했다.

내가 맨처음 영화판에 끼어 들 때도 그런 사회분위기가 한몫했던 것 같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55년) 등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인기였는데, 부산에 있던 나도 그런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 "영화를 같이 하자" 는 주변사람들의 제안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어쨌든 그런 인연으로 흘러와 지금 '춘향뎐' 을 준비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사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이전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 의 히트 덕도 좀 봤다.

제1 조감독을 맡아 이 작품의 성공을 일궈냈으니 영화사에서 나에게 눈독을 들였던 모양이다.

마침 '장희빈' 을 찍다 정감독하고 틀어지는 일이 생겨 잠시 쉬고 있는데 한흥영화사에서 "작품하나 하자" 는 제안이 왔다.

이 영화사는 신생영화사로 정감독의 작품을 주로 해왔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과 홍성기 감독의 선민영화사 등 여타의 명문 (名門) 영화사에는 못미쳤지만 액션영화로 짭짤한 흥행작을 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조국애에 불타는 학생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받으며 쫓겨가면서도 두만강을 거점으로 장렬하게 싸워 이긴다는, 독립운동을 빙자한 저급한 활극 (活劇) 이었다.

조감독으로 정감독 밑에서 한솥밥을 먹던 정진우가 붙었다.

최사장은 "감독은 자네가 하고 정진우가 옆에서 도와 같이 해라" 고 못박았다.

정진우는 나이로는 나보다 밑이었는데 곧잘 동갑이라며 우기곤 했다.

나는 미안한 생각에 정진우와 이런 약속을 했다.

"이번에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네가 '입봉' (데뷔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 때 돕겠다" .그러나 이 약속은 기회를 잡지 못해 끝내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내게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특별히 다뤄보고 싶은 주제라기 보다는 철저히 흥행을 위한 이야기 중심 영화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독립군 이야기를 빌어서 만든 '돈벌이용' 액션드라마였다.

제작자의 주문생산에 내가 고용된 셈이다.

그런데도 영화사는 아무래로 신인 감독이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영화사는 촬영감독에 최호진이라는 베테랑을 붙였고 출연진도 인기스타였던 김석훈을 비롯, 문정숙.엄앵란.황해 등 쟁쟁한 배우들이 포진했다.

어쨌든 나는 혼신을 다해 데뷔작에 매달렸다.

얼마나 고지식하게 작품에 몰두했던지 나는 정강이가 썩어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촬영을 마치고 당시 안양스튜디오에서 편집.녹음을 하는데 어디서 썩은 내가 나길래 몇날며칠을 신고있던 군화를 그제서야 벗어봤더니 바로 원인은 내 정강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나는 감독을 맡게 되자 그동안 영화사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던 걸 청산하고 하숙을 하기 시작했다.

충무로 스카라극장 근처의 왜식 2층 가옥이 하숙집이었다.

다다미방이니까 온돌이 없어 타원형의 양철로 된 통 (당시엔 '유담프' 라고 불렀다) 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수건을 칭칭 동여매 아랫목에 놓고 마치 난방기구처럼 쓰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자다가 얼떨결에 발길로 이걸 걷어차 그 뜨거운 물이 오른쪽 정강이를 덮쳐 화상을 입었던 것. 그러나 나는 대관령.진부령 등 촬영지를 정신없이 쏘다니느라 정강이가 썩어가는 줄로 모른 채 20여일을 방치했던 것이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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