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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노트] “빨래판으로 썼다니요” 문무왕릉비 조각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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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며칠 전 ‘빨래판으로 써온 신라 문무왕릉비 윗조각 찾아’란 기사를 썼다(본지 9월 4일자 2면). 200여 년 전 발견했으나 행방이 다시 묘연해진 비석 윗쪽 부분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 수돗가에서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7일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문무왕릉비가 재발견된 집주인 송원수(44)씨였다. “2살 때 이 집으로 이사와 40여 년 살았지만 그 비석을 빨래판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글자가 적혀있어 10년 전 관계부처에 신고했지만 묵살당했고, 7년 전엔 돌을 사가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내놓지 않았습니다. 억울합니다.”

빨래판이라 보도된 데에는 몇몇 요소들이 얽혔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수돗가에 놓인 위치로 보아 “빨래판 비슷하게 쓰던 것”이라고 설명했고, 기자는 ‘비슷하게’라는 말을 생략한 채 기사를 썼다. 조금 더 극적인 이야기로 몰아가는 언론의 속성 탓이다. 송원수씨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변명하자면 문화재급 비석이 빨래판으로 사용된 선례도 작용했다. 1979년 충북 충주시 입석부락 들머리에서 발굴된 중원고구려비는 마을 사람들이 냇가에 눕혀놓고 빨랫돌로 사용하던 상태에서 발견된 바 있다. 비석이란 크고 판판해 빨랫돌로 쓰기에 더없이 좋은 돌이기도 하다. 이건무 문화재청장부터 내로라하는 고고학 전문가들이 최근 발간한 책 『천 번의 붓질 한 번의 입맞춤』에도 그런 사례가 수두룩하다. 한탄강 유원지에서 발길에 채이던 돌이 구석기시대 주먹도끼였고, 인류의 조상인 베이징 원인의 어금니는 ‘용골’이란 한약재로 팔려나갈 뻔 했다.

흔히 까막눈을 표현할 때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고 말한다. 문화재가 딱 그런 식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겐 그저 발길에 채이는 돌이요, 알아보는 이에겐 보물인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집안에, 마을 어귀에, ‘문화재 까막눈’은 못 보는 보물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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