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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여성’ 약점을 국익 위해 활용한 엘리자베스 1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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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533년 9월 7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년·그림)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종교적 분열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고 국고는 고갈됐다. 밖에서는 교황·신성로마제국·스페인·프랑스·포르투갈 등 국제 가톨릭동맹이 위협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미혼 여성 군주라는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해 영국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유럽 왕족들 사이에서 ‘막대한 지참금과 명예를 지닌 헬레네 같은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결혼 문제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처신은 절묘했다. 결혼 적령기를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가치를 한껏 드높인 상태에서 대외 관계를 요리했다. 쟁쟁한 청혼자들이 즐비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상대는 프랑스 국왕의 동생 알랑송 공작이었다. 혼담이 시작된 1572년 당시 여왕은 39세, 알랑송은 16세로 나이 차가 무려 23세였다.

프랑스를 영국 편에 잡아둠으로써 스페인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결혼협상은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질질 끌기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알랑송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 혼담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주변에서는 그가 나중에 속았다는 것을 알면 보복하려 들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여왕은 그 관계를 끌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끌고 간 뒤 결과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대처하는 방식을 택했다. 결혼협상은 10년이나 끌다가 1581년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어찌나 세련되고 교묘하게 퇴짜를 놓았던지 알랑송은 여왕에게 전혀 악의를 품지 않았다.

여왕은 알랑송 외에도 유럽의 여러 구혼자들과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결혼이 가능할 것 같은 인상을 주면서 특유의 유연한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구혼자들이 결혼협상에서 영국에 유리한 온갖 약속을 제시하도록 유도하는가 하면 구혼자들을 퇴짜 놓는 데도 명수였다. 마침내 영국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펠리페 2세에게 쓴맛을 보여줬다.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이 유럽 열강의 지위로 오른 데는 결혼협상을 이용한 엘리자베스의 노련한 외교술이 큰 몫을 했다. 능유제강(能柔制强)의 ‘국익 외교’를 실천한 엘리자베스의 외교 수완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 아닐까.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