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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충청 집념에 정정길 “鄭은 중도 실용주의자” 천거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가 5일 오전 인사청문회와 관련한 준비를 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정부중앙청사 창성동 별관에 도착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정운찬 총리설’이 처음 나왔을 때 다수의 청와대 관계자는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이명박(MB) 대통령이 충청 출신을 찾고 있으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앞 순위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게 고위 관계자들의 얘기였다. 그들은 “이 대통령과 정 전 총장은 케미스트리(chemistry·궁합)가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8월 중순 기자와 만난 청와대 고위 인사는 “정 전 총장은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라고 한 MB의 요청을 거절한 데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을 진보적 관점에서 비판해 온 인물”이라며 “MB가 썩 좋아하지 않는 분을 총리로 쓸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말했다. 며칠 뒤 청와대 관계자는 “정 전 총장의 이름이 총리 후보군에서 삭제됐다”고 여러 기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이 대통령이 애착을 갖고 추진했던 ‘심대평 총리’ 카드가 ‘스님의 빗’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충남 지사 출신으로 자유선진당 대표를 맡고 있던 심대평(12면 인터뷰 참조) 의원을 총리로 기용하려 했다. 그러나 선진당 이회창 총재가 가로막았다. “심 의원을 데려가려면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고, 국가 체제를 강소국연방제(전국을 인구 500만~1000만 명 규모의 몇 개 연방으로 나누자는 주장)로 바꾸는 데 찬성하라”고 요구했고, 이 대통령은 난색을 표시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심 의원은 지난달 30일 “이 총재의 독선과 독단을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탈당을 선언하면서 “총리직도 맡지 않겠다”고 했다.

정정길 “정운찬은 유연한 인물”
이 대통령은 난감했다. 급히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정운찬 카드’가 부활했다.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 출신인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운찬을 쓰면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정 실장은 “정운찬은 중도 성향의 실용주의자”라며 “서울대라는 큰 조직을 잘 운영했고, 유연하게 처신하는 인물이므로 총리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런 정 실장에 대해 정 전 총장은 “인격이 훌륭하고 리더십이 있는 분”이라고 사석에서 여러 번 말했다.

중도와 실용을 국정 어젠다로 설정한 이 대통령은 정 실장의 강력한 천거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정 실장이 정 전 총장을 직접 만나 의향을 물어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 실장은 총리 문제와 관련해 이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잘 읽고 있었다. 이 대통령이 왜 충청 출신을 기용하려 하는지, 왜 심 의원처럼 행정 능력이 검증된 인사를 쓰려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 전 총장이 총리로 낙점되는 과정을 잘 아는 인사는 정 실장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MB는 대선 때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취임 이후 국민에 대해 두려움(phobia)을 갖게 됐다. 지난해 조각을 끝내자 ‘강부자(강남 부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 내각이라는 등 야유의 확산으로 지지율 추락을 경험한 데다 촛불시위까지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MB는 이번에 국민의 눈을 의식했다. 그는 유능한 충청 출신을 총리로 기용하면 국민통합과 화합을 지향하는 모양새가 되므로 박수를 받을 수 있고, 여권에 냉담한 충청 민심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남이 현재 박근혜 전 대표의 수중에 있는 상황이므로 MB는 충청만큼은 꼭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충청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그런 걸 아는 정 실장이 심대평 대안으로 정운찬을 제시하면서 민심에 반향을 일으킬 인물이라고 강조하자 MB는 결심했다. MB와 정운찬-역설(paradox)의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청와대, 세종시·4대 강 면접시험
1일 정 실장은 정 전 총장과 만났다. 그리고 “대통령이 총리로 쓰고 싶어 한다”며 몇 가지를 확인하려 했다 한다. 몇 가지란 국정 운영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정 전 총장의 견해, 그리고 그가 비판해 온 세종시 건설, 4대 강 정비 등 MB의 일부 정책에 관한 것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는 말했다. 정 전 총장은 “생각을 좀 하고 나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한다.

다음 날 오전 정 전 총장은 절친한 사이인 민주당 김종인 전 의원과 만나 의견을 들었다. 경제학자로 서강대 교수 출신인 김 전 의원은 정 전 총장이 특히 존경하는 정치인이다. 정 전 총장이 1986년 서울대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교수 서명운동을 주동했을 때 군사정권은 서명 교수 49명을 모두 해직하고, 주모자는 엄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때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김 전 의원이 나섰다. 그는 “교수 49명은 고사하고 주동자 3명만 해직시켜도 서울대가 발칵 뒤집힐 것이고, 정권은 국제적으로 망신당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설득했고, 정 전 총장은 처벌을 면했다.

김 전 의원은 정 전 총장에게 “참여할 의사가 있으면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종시 문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정 전 총장도 “바른 소리를 해야 할 땐 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정 전 총장은 스승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와도 상의했다. 조 전 부총리도 “열심히 해 보라”며 총리행을 권했다고 한다.

정 전 총장은 2일 정 실장을 만나 총리직 제의를 수락하겠다고 했다. 이때 세종시, 4대 강 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도 설명했으며 대통령의 중도실용주의를 잘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다음 날 오전 이 대통령은 정 전 총장을 만났다. 이 대통령은 정 총리 후보자에게 중도·실용과 서민정책을 강조했다고 한다. “서민을 보살피고 국민을 통합하는 일에 주력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밝혔다.

일곱 가족 방 한 칸에 살았던 가난
개각 발표가 있은 다음 정 총리 후보자는 기자들에게 “대통령을 만나 보니 말이 잘 통했다”고 했다. 기자회견에선 “대통령과 나의 경제철학에 큰 이견이 없다. (사회적으로) 뒤처진 사람에 대해 따뜻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정 총리 후보자는 서민의 아들이다. 할아버지가 광산업에 실패하면서 심한 가난을 겪은 그의 가족은 충남 공주를 떠나 서울 동숭동 달동네에 자리 잡았다. 정 총리 후보자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의 일가족 7명이 살던 공간은 방 한 칸이었다. 아버지는 숯과 땔감을 파는 구멍가게를 했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다. 정 총리 후보자가 야구를 좋아한 건 이때부터다. 그는 “꽉 막힌 집과 답답한 학교 사이에 짬짬이 후련한 돌파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야구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서울대 총장 시절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했다. 서울의 유명 학원에서 배우지 못한 시골 학생에게 서울대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에서 그런 것이다. 그는 “언젠가는 계층별 균형선발제도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학생이 서울대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의 지인 가운데 상당수는 “학자로서 이 대통령의 정책을 많이 비판했지만 총리가 된 다음에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대통령과 크게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총리 후보자는 4일 밤 몇몇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며 “가능한 한 몸을 낮추고 일하겠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그에게 “할 말을 해야겠지만 총리가 대통령보다 더 빛나려 하면 안 된다. 그런 점을 늘 염두에 두라”고 충고했다 한다.

대학 때 경제원론 과목서 F학점
정 총리 후보자는 잘 웃고 부드럽게 말한다. 그를 만나면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지인들은 “정운찬이 화를 내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겐 욱하는 반골 기질도 있다. 그는 대학 시절 경제원론에서 F학점을 받았다. 기말고사의 답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목 중간고사의 문제는 ‘쌀 파동을 설명하라’였다.

그는 그래프까지 그려 가며 답안을 성의 있게 작성했다. 그런데 기말고사 문제지를 보고 비위가 상했다. 문제는 ‘연탄 파동을 설명하라’였다. 그는 교수가 무성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 “교수님, 제 중간고사 답안지를 참고하십시오. 쌀 파동에 대해 적용한 이론과 동일합니다.”

교양독어에서도 F를 받았다. 그는 담당 교수가 고교 시절 잘살던 친구의 과외선생이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교수가 고교생 과외로 부수입을 올리다니 학자답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시험 때 백지를 내버렸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시절 정부의 정책을 독하게 비판했던 건 학생 때의 기질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정말 비위에 거슬리면 이 대통령과도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정 총리 후보자는 서울대에서 어렵고 특이한 시험 문제를 내기로 유명했다. 기자가 대학생 때 수강한 경제통계학 과목에선 ‘표본평균을 초등학교 3, 4학년에게 가르친다면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라는 시험 문제를 냈다.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답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문제였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기억이 난다. 경제학개론 시험에서는 ‘로마의 흥망을 빵과 서커스의 개념으로 설명하라’는 문제도 냈다. 당시로선 기상천외한 시험 문제는 학생의 이해력과 창의성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늘 창의성·창발성을 강조했다. 대입 논술고사는 유명 학원이나 과외선생이 판박이로 가르치는 ‘글쓰기 기술’을 조장할 뿐이므로 학생의 창의성과 잠재력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가 행정을 하면서 어떤 창의성을 발휘할지 궁금하다.

“박근혜에게서 애국심 배워야”
정 총리 후보자는 자신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항마로 보는 시각을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주변 인사들은 말했다. 그는 4일 밤 만난 지인들에게 “차기 대권 문제와 관련해 이상한 말들이 나오지만 나는 총리 업무에 전념할 것이며, 내 행보가 정치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교수 시절 박 전 대표를 높이 평가했다. 사석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때 탄핵의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을 구한 분이 박 전 대표이고, 당의 민주화와 개혁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한 분”이라며 “박 전 대표의 애국심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연합 순방을 마치고 5일 귀국한 박 전 대표에게 조만간 전화를 걸어 인사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지인은 “정 총리 후보자의 향후 언행을 보면 ‘박근혜 대항마설’이 추측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며 “정 총리 후보자의 머릿속에 차기 대권은 아직 들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귀국한 박 전 대표는 기자들에게 “정 총리 후보자는 훌륭한 분이며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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