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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도시들] 4. 몬트리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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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비행기와 유전자. '거대' 와 '극소 (極小)' 로 뚜렷이 대비되는 항공.생명공학 산업은 오늘의 몬트리올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몬트리올은 17세기 프랑스 탐험대 40여명이 세인트 로렌스 강가에 세운 '빌 마리' 마을에서 비롯됐다.

유럽의 모피 붐을 타고 비버 모피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 중개지로 번창 일로를 치달았다.

18세기 모피 붐이 꺾인 뒤에도 축적된 자본으로 광산.철도를 개발하는 등 도시화가 계속됐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연스럽게 캐나다의 금융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항공산업은 1차세계대전 (1914~1918) 후 영국 항공기를 하청 받아 조립하면서 시작됐다.

2차세계대전 (1939~1945) 중에도 모스키토 폭격기나 연락기 등 미 군용기를 하청제작하면서 차근차근 기초를 쌓았다.

1950년부터는 국산화에 힘써 한국전쟁 때 출격한 요격기 6백여대를 자체기술로 조달할 만큼 성장, 주요 기술지원국이던 미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60년대 들어와 세계적으로 항공기 수요가 줄자 생산.고용이 급격히 둔화됐다.

이때 몬트리올이 착안한 것이 항공기 분야의 '틈새시장' . "우리는 경쟁력이 모자라는 대형 비행기가 아닌 중형 비행기.헬리콥터의 가능성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그게 맞아떨어졌어요. 두고 보십시오. 21세기엔 보통사람들도 고속버스 타듯 비행기를 타고 국내외로 여행할 겁니다. 중소형 항공기의 기동력이 돋보이는 시대가 본격화되는 것이지요. "

몬트리올 시내에 자리잡은 퀘벡주 (州) 상무부 항공산업담당 질 브라방 참사관의 설명이다.

실제로 몬트리올에는 승객 70~1백명 규모의 중형 비행기로 세계시장에서 독보적 위치에 있는 봄바르디에사를 비롯, 롤스로이스 캐나다.벨 헬리콥터 텍스트론 캐나다.스파 에어로스페이스 등 탄탄한 항공업체들이 즐비하다.

벨 캐나다의 경우 한국 삼성항공과 신형 헬리콥터를 합작으로 개발, 내년부터 양산체제에 들어갈 예정. 이들은 지난해에 몬트리올이 속한 퀘벡주 산업생산량의 75%에 달하는 50억 캐나다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항공업체들은 우주왕복선.지역제트기.위성개발 등으로 영역을 넓혀 다음 세기 초반에 일찌감치 세계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에 차 있다.

지난해 미 항공우주국 (NASA) 이 쏘아올린 우주정거장의 로봇 팔도 몬트리올에서 생산됐다.

금상첨화 (錦上添花) 인 것은 캐나다 우주국.맥길대 항공우주법연구소는 물론 국제민간항공기구 (ICAO).국제항공운송협회 (IATA).국제운항관리연구소 (IAMTI).국제항공통신협회 (ISAT) 등 항공관련 국제기구 본부를 설립 초기부터 몬트리올에 유치한 점. 이들 기관은 '비행기의 메카' 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몬트리올의 또 다른 축은 생명공학. 몬트리올 한국 총영사관 이용일 영사는 "이곳 생명공학의 '생명' 은 맨파워와 세금혜택" 이라고 잘라 말했다.

"캐나다 최고의 명문인 맥길대.몬트리올대 등에서 생명공학 관련 학위소지자가 매년 2천명씩 배출되고 있어요. 치열한 경쟁 덕에 신기술이 속속 나오는데다 정부가 파격적인 세금혜택으로 해외기업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발전이 없다면 이상하지요. " 몬트리올에 입주하는 기업은 R&D 투자액에 세금공제 혜택을 받는다.

법인세율은 북미지역에서 가장 낮다.

이곳의 독특한 '우수연구자 네트워크시스템' 도 생명공학의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다.

북미주 시장에서 에이즈 치료제로 가장 널리 처방되고 있는 바이오캠사의 '3TC' 도 이같은 시스템 속에서 탄생했다.

몬트리올 북동부에는 '생명공학의 실리콘 밸리' 로 불리는 '테크노 파크' 가 따로 자리잡고 있다.

신기술.창업을 지원하는 밴처캐피털은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성업 중. 자본금 1천만달러로 시작해 9년만에 1억5천만달러 규모로 회사를 성장시킨 바이오캐피털의 노르망드 발타작 사장은 "에이즈.암 치료제뿐 아니라 유전공학 부문의 밴처기업들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고 밝혔다.

몬트리올은 외형상 모피 - 섬유 - 금융 - 항공산업 등으로 '주특기' 를 순탄하게 바꾸며 발전해 왔다.

그러나 다른 선진국 도시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이곳만의 '정신적인 암 (癌)' 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극복한 역사에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다름 아닌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민족감정 문제. 이 도시를 '북미의 파리' 라고 부르는 데는 아름답다는 의미보다 주민 다수 (80%)가 프랑스계라는 이유가 더 크다.

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에 걸쳐 몬트리올과 퀘벡주에서는 캐나다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국을 건설하자는 분리독립 운동이 한창이었다.

조직적인 테러마저 빈발해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금융기관과 주요 기업들 사이에 토론토나 밴쿠버 등으로 이주하는 붐까지 일었다.

그 때문에 67년 북미 최초의 산업박람회 (EXPO) 개최로 한층 도약할 듯했던 몬트리올은 침체상태에 접어들었다.

1980년 퀘벡주 분리여부를 놓고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결과는 41%만이 분리에 찬성해 부결. 이후 과격한 테러는 잦아 들었고 주민들은 '뿌리갈등' 을 딛고 일터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상류.보수층 가운데는 분리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지만 대세는 투표결과에 승복하는 민주주의 편. 현재의 번영은 최대의 갈등요인이 평화적으로 고비를 넘긴 데 따른 혜택이기도 하다.

몬트리올 = 서회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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