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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상승 내다보면서 부동산·우량주로 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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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26면

주식·펀드·채권 등에 20억원을 투자해온 이모(43)씨는 최근 15억원을 현금화해 한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넣어뒀다. 시가총액 20위권 미만인 직접투자 주식과 채권형 펀드를 주로 정리했다. “주식은 금융위기 전 코스피지수의 60% 이상 반등해 추가 상승 여력이 줄었고 채권도 돈이 너무 많이 풀려 금리가 오를 수밖에 없다(채권값 하락)고 판단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그가 요즘 찾아다니는 투자처는 부동산이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에 대비하는 데는 실물자산, 역시 부동산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요즘 단기간에 많이 오른 일반 아파트보다는 고정적인 수입과 매매차익을 함께 기대할 수 있는 상가 쪽을 유심히 보고 있다.

요즘 부자들 강남 PB 69명에게 들어보니 …

시장을 선도하는 ‘스마트 머니’들은 대개 이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중앙SUNDAY가 서울 강남지역의 은행·증권사 프라이빗 뱅커(PB) 69명을 통해 부자고객들의 투자 보따리를 들여다본 결과다. 최소 5억원, 많게는 수백억원대의 돈을 굴리는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의 경험을 곱씹으며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길목을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위기의 뒷면은 기회
외환위기는 정부·기업뿐 아니라 개인의 재테크 마인드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위기라는 동전의 뒷면은 기회’라는 점을 꿰뚫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격변하는 재테크 전선에서 멀리 뒤처졌다. 불려야만 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재테크의 속성을 외면하고 갖고 있는 돈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결과였다. 한 가지 자산을 고집해선 돈을 불리기 힘들다는 교훈도 새로 생겨났다.

외환위기 직후 최고의 투자처는 채권이었다. 대기업 채권조차 연 확정금리 25%짜리가 수두룩했다. 위기 발발 1년여가 지나자 280까지 폭락했던 코스피지수가 가파르게 반등하기 시작했다. 월드컵을 개최한 2002년 이후엔 아파트로 대표되는 부동산이 자산시장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똑똑한 돈을 움직이는 부자들의 대다수는 이번에도 외환위기 이후의 릴레이식 상승 흐름이 또다시 나타날 것이란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다”는 게 미래에셋 김기영 팀장의 말이다.

이번 설문에서 이 같은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선 주가 상승에 대한 확신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고객들이 추가 상승을 점치고 있다고 응답한 PB들은 전체의 3분의 1 남짓이었다. 3분기 조정을 거쳐 4분기에 다시 오를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11%)을 합해도 절반이 채 안 된다. 증시를 낙관하는 사람들도 지수 예상치를 1800선 이하로 잡는 경우가 많았다. 수익보다 리스크가 커지는 시점이라고 보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김홍모 IBK투자증권 서초지점 차장은 “고객들이 연말까지는 기업 실적과 외국인 매수세로 오르겠지만 상승세가 차츰 둔화하고 내년 장세는 불투명할 것으로 보는 편”이라고 전했다. 과잉 유동성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되고 있다. 물가 상승으로 금리 인상 등 출구전략이 불가피해지면서 주가를 끌어올릴 주동력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이다. 정부에선 출구전략을 쓸 계획이 없다고 하지만, 부자들은 이를 별로 믿지 않고 있었다. 주식을 더 사는 사람보다는 있는 주식을 줄이는 사람이 두 배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류정아 우리투자증권 압구정PB 부장은 “고객들의 최대 관심은 인플레이션 헤지”라고 전했다. 주가가 올라도 물가가 뛰면 실질 수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부동산과 실물자산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주식 관심 절반으로 줄어
1년 전만 해도 부동산은 천덕꾸러기였다. 미국 등 해외 부동산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고 국내에서도 대세 하락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강남 부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실시했던 똑같은 설문에서 ‘가장 먼저 줄여야 할 자산’으로 꼽힌 게 부동산이었다.

하지만 이번 설문에서 부동산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자들의 절반 정도는 앞으로 가장 유망해 보이는 투자처로 부동산을 꼽았다. 지난해에 비해 올 투자금액이 많게는 5배까지 늘었다는 게 일선 PB들의 말이다. 주식이 가장 괜찮아 보인다는 사람들은 셋 중 한 명꼴이었다. 1년 전의 절반 수준이다. 채권과 금·곡물·자원 등 대안투자용 실물자산을 꼽은 사람들은 각각 10% 이하였다. 금리 상승으로 채권값이 떨어지고, 부동산을 대체해 거액을 투자할 만한 실물자산이 마땅치 않은 게 이유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다고 모든 부동산이 부자들의 러브콜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등 일반 주택에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이 올라 거품이 끼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덜 올랐거나 더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것은 상가(31%)와 재건축·재개발 아파트(34%)였다. 오피스텔과 소형 아파트, 빌라 등 월세를 받을 수 있는 부동산과 수도권의 개발지역 토지·건물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여전히 주식을 가장 사랑하는 이들도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었다. 정병민 우리은행 테헤란로지점 팀장은 “경기가 살아나고 버블 우려가 커지면 부동산, 특히 주택 관련 버블을 정부가 용인하지 않을 테고, 결국 주식으로 다시 관심이 몰릴 수밖에 없다는 인식들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박환기 대신증권 청담지점 부지점장은 “최근 지수 관련 대형주들의 상승이 돈 많은 자산가를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천덕꾸러기 된 펀드
화려하게 각광을 받던 펀드는 부자들 사이에서 체면을 구기고 있다. 고객이 펀드를 환매하고 있다고 응답한 PB들이 전체의 77%를 차지해 새로 가입하고 있다는 응답(10%)의 8배에 가까웠다. 장세 전망 이외의 요인이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병국 동양종금증권 강남역 지점 과장은 “펀드의 운용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기 어렵고 운용 방식에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며 “최근 1~2년간 마음고생을 겪어서인지 부동산이나 더 나은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제일 먼저 펀드를 없애겠다는 고객이 많다”고 전했다. 앞으로 주식에 투자할 의사가 있는 부자들도 펀드에 가입하기보다 직접 투자를 하겠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직접 투자는 유행에 뒤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분위기다. 직접 투자의 대상으로 선호되는 것은 반도체·전기·자동차 등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국내 증시의 대표종목들이다.

중국과 인도·일본 등 해외증시에 대한 관심은 싸늘하게 식었다. 대신증권 박 부지점장은 “펀드 환매 뒤 다른 펀드로 갈아타기보다는 직접 투자에 나서는 사람이 훨씬 많다”며 “해외펀드가 원금을 회복할 때쯤 이런 추세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불신은 펀드를 유망 상품으로 꼽은 이들에게까지 퍼지고 있었다. 펀드에 가입해도 인덱스 펀드에 거치식으로 넣을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삼성그룹주 펀드나 대표우량주 펀드 등 똑똑한 종목들만으로 구성된 펀드들에 기간을 분산해 돈을 나눠 넣는 방식이 인기를 얻고 있다. 정대중 외환은행 잠실역지점 팀장은 “같은 시기에 든 펀드 중 거치식은 원금이 될까 말까 하지만 적립식은 20%가량 수익을 냈다”며 “분산 투자의 효과를 경험해본 고객들이 큰 금액도 매달 나눠 거치식으로 넣으려 한다”고 말했다.
 
고금리 특판·후순위채 관심
부동산과 주식으로 관심 분야는 갈려도 지금은 한 박자 쉬어갈 때라고 보는 분위기는 공통적이다. 김은미 한화증권 르네상스지점 부지점장은 “세계경제와, 국내 정책 등에서 변수가 많아 유망하다고 생각한 투자처에 과감하게 발을 담그지는 못하고 있다”며 “손실을 크게 줄였거나 수익이 난 펀드부터 환매해 실탄을 쌓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렇게 마련한 현금은 주로 단기 상품에 넣어둔다. 증권사의 CMA, 은행의 고금리 특판예금, 만기가 다가오는 회사채 등이 대표적이다. 올 연말 발행이 예상되는 은행 후순위채에도 벌써 관심이 몰린다.

백미경 하나은행 정자중앙지점장은 “해가 뜨고 지는 아침과 저녁 무렵에 고기가 잘 잡히는 걸 아는 경험 많은 낚시꾼은 물이 아닌 하늘을 쳐다본다”며 “고수들이 많은 강남부자들도 시장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재테크 시장의 ‘물때’가 바뀌길 기다리며 밑밥(현금)을 든든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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