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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사라져가는 겸재의 실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내가 익산에서 한의사가 되는 꿈을 달래며 고학 (苦學) 의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시간이 있으면 전주엘 곧잘 갔다.

맛있는 것을 사먹으러, 영화를 보러, 사람을 만나러…. 그리고 무엇보다 벚꽃잎 휘날리는 탁트인 논뻘의 전군 (全.群)가도를 달리는 기분은 하숙골방에 쑤셔박혀 뒤적이고 있던 당시의 나로선 해탈의 열락이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의문의 빛줄기가 있었다.

익산과 전주 사이 광활한 논 사이에 삼례라는 조그만 읍이 있다.

1892년 11월 동학교조신원운동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던, 우리나라 근대 여명의 서광이 어렸던 곳, 그곳으로부터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쏘아대는 거대한 여러 줄기의 레이저 빔이 익산과 전주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강렬하게 1백80도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일 밤, 어김없이!

나는 그것이 정적한 시골의 밤하늘을 어지럽히는 불협성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곳에 공군기지가 있어 대공정찰과 관계되는 무슨 시설이거니 하고 몇년을 지나쳤다.

졸업할 때 쯤 우연히 알게 된 그 레이저 빔의 정체! 참으로 놀라웠다.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의 황당무계함에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삼례에 있는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이리와 전주의 손님들을 끌기 위해 매일 밤 광고용으로 쏘아대는 레이저 빔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시설이 관계주무관청에서 허락이 날 수 있으며, 우리나라 국방부는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일까? 그리고 그 드넓은 전라도 밤하늘 영공이 일개 나이트클럽의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10여년간 자행돼도 그것을 저지시킬 수 있는 그 지역의 언론이나 시민의 도덕성이 부재한단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우리 시대의 상식으로 방치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엊그제 밤, 오랜만에 귀국해 동행한 외국인들과 남산에 올라갔다가 목격한 광경이었다.

동대문밖에 치솟은 고층빌딩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서울의 영공에 어지럽게 V자형으로 빔을 쏘아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산타워! 밤 장사를 잘하기 위해 주변을 밝히는 것은 내 탓할 나위없다.

그러나 서울의 밤하늘은 한 빌딩의 자의적 불협화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어두움은 자연과 인간 모두의 어두움이다.

한 개체가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의 밤하늘이 이러한 식으로 사유화돼간다고 생각해 보라!

사방의 나이트클럽에서 레이저 빔을 쏘아대고! 두산타워의 조명방식은 즉각 시정돼야 한다.

건물 자체의 조명에 국한돼야 할 것이다.

남산을 안산 (案山) 으로 하고 앉아 있는 경복궁터에서 바라보면 그 좌청룡이 과거 서울대가 자리잡았던 낙산 (駱山) 이요, 그 우백호가 연세대가 자리잡은 안산 (鞍山) - 무악 (毋岳) 이다.

양쪽 산이 모두 동물의 등모양에서 이름을 땄는데 조선 명종때의 명인 남사고 (南師古)가 낙 (駱).안 (鞍) 의 글자를 풀어 동인 (東人) 과 서인 (西人) 의 미래를 예측한 것은 유명한 고사다.

판소리 '흥보가' 에 보면 제비가 서울 올 때 반드시 거쳐가는 곳으로 안산이 정겹게 그려진다.

겸재가 그린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 를 마주보고 있는 안산 - 무악은 아직도 준수한 기암과 수림으로 덮여 있어 사방에서 약수가 솟아나고 주변 시민들의 새벽 산보코스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서대문구청에서 이 산허리를 뺑도려내 12m폭의 대순환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또 하나의 발상이다.

주변 시민들의 반발은 물론 1천여년의 고찰 봉원사의 전폭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청은 2백억원대의 대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한다.

도대체 이 무슨 망발인가? 전혀 서울시의 교통난해소와 무관한 이 도로에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연세대 총학생회에서는 저지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자연이란, 스스로 자 (自) 그럴 연 (然)!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귀중한 자연을 방치해둔 죄업을 씻기 위해 이 공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씀이오나 자연이란 방치할수록, 스스로 그러할수록 좋은 것이외다.

제발 그만두시오!

내 이렇게 촉박한 붓을 옮기는 뜻은 우리 민족이 하루빨리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IMF 회복의 길이 더 이상 물리적 개발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의 심화에 있다는 것이다.

삶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할 때다.

무책임한 그린벨트 정책도 반성을 촉구한다.

감용옥 철학자.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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