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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7) 춘향이에 빠지다

나는 지금 춘향이와 한창 사랑에 빠져있다.

4월 하순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가는 신작 '춘향뎐' (내년 설 개봉 예정) 때문이다.

지난 4일에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주인공 오디션이 열렸다.

성춘향과 이몽룡 역으로 각각 이효정과 조승우라는 풋내기 둘이 뽑혔다.

전혀 때 묻지않은 풋풋한 얼굴이 썩 맘에 들었다.

원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신인을 기용하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장군의 아들' (박상민) 이나 '서편제' (오정해) 처럼 '춘향뎐' 도 신인을 택했다.

나는 신인들의 싱싱함이 좋다.

기성연기자들의 고착화된 이미지를 개량, 활용하는 것보다 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에 오히려 큰 기대를 거는 편이다.

박상민.오정해는 나의 그런 욕심을 잘 채워줬다.

지금까지 나온 춘향전 영화는 10편도 넘는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늘 당대 최고 배우의 몫이었다.

최은희.장미희 등등. 이러다보니 30대가 16세 춘향을 연기하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나는 이런 발상으로는 춘향의 원래 이미지를 제대로 복원해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몽룡도 그랬다.

'춘향뎐' 은 '서편제' 시절부터 구상했다.

어느날 촬영지 헌팅을 다녀오던중 차안에서 들은 명창 조상현의 완창 '춘향가' 가 내 혼을 쏙 뺐다.

소름이 쫙 끼칠정도의 충격이었다.

"바로 저것이로구나. 비록 '서편제' 에서 판소리의 진가를 못살리더라도 언젠가는 '춘향가' 에 도전해보자. " 그로부터 5년이 흘러 지난해 가을. 그런 막연했던 상념들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면서 영화 '춘향뎐' 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꿈결에서도 '춘향가' 의 한 대목과 영상이 오버랩되면서 조상현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춘향뎐' 을 '소리의 영화' 로 만들고 싶었다.

'춘향가' 의 내용과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장면과 소리가 딱 맞게 어울려가는 그런 영화. 별도의 시나리오도 필요없을 것 같았다.

들어보니 조상현의 소리 자체가 하나의 시나리오요 드라마였다.

인물설정도, 대사도 다 그 속에 녹아있으니 무슨 군더더기가 필요할까. 그러나 시간이 문제였다.

4시간30분이나 되는 완창 판소리를 영화적 시간으로 옮기는 작업이 걸림돌이었다.

나는 '춘향가' 중 중요한 몇 대목을 수용하면서 말로 상황을 설명해가는 '아니리' 를 삽입해 풀어갈 계획이다.

영화의 템포와 리듬도 역시 '춘향가' 를 따를 것이다.

처음엔 느릿느릿한 진양조로 시작해 어사출도 대목 같은 데서는 아주 긴박한 휘모리장단으로 몰아가는 식이다.

나는 이런 방법을 통해 대충 스토리만 좇던 기존의 춘향전 영화와는 다른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춘향가' 에 빠진 이유는 비단 정한 (情恨) 의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춘향가는 우리 풍속사의 보고 (寶庫) 다.

나는 앞으로 그런 보물들을 영상으로 재현, 한편의 방대한 '기록필름' 처럼 꾸밀 것이다.

바로 그 '우리 것' 이야말로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값진 유산이란 생각에서다.

변사또 장면에는 조선시대 관아의 생활상을 촘촘히 박을 것이다.

그 잔치상에 차려진 음식을 통해 당시 음식문화도 재현할 것이다.

천민계급과 기생의 의복과 생활, 민속음악 등. 영상으로 보여줄 '우리 것' 은 무궁무진하다.

나에게 '춘향뎐' 은 또 하나의 도전이다.

'서편제' 시절과 달리 벌써부터 이 신작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커 어깨가 무겁다.

나는 '춘향뎐' 을 우리의 문화적 개성이 드러나는 한국영화의 표상으로 만들고 싶다.

'춘향뎐' 이 완성되는 날 나는 "판소리가 전위음악 같다" 던 '서편제' 시절의 그 외국감독을 찾아 이 영화를 보여주며 물을 것이다.

"아직도 그런 생각이냐" 고.

글=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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