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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장애인이 무슨 연극? “그런 편견 깨려고 무대 서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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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휠’ 단원들이 서울 관악구 연습실에 모였다. 호종민(뒷줄 왼쪽에서 둘째)씨는 발음과 발성 연습을 위해 1년 넘게 혼자 노래방을 찾았다고 한다. 단원들은 연극을 통해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었다. [오종택 기자]

“오십이만 오천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말해요. 산다는 것.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느껴봐요. 기억해요. 사랑. 간직해요. 사랑.”

지난달 17일 오후 관악구 신원동 극단 ‘휠’ 지하연습실. 문틈으로 뮤지컬 『렌트』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노래의 주인공은 호종민(33)씨. 호씨가 부르는 노래는 박자가 맞지 않았고 음정 높낮이가 불안했다. 고음 처리가 잘 안 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가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뇌병변(2급)을 앓고 있어 얼굴과 다리가 쉴 새 없이 떨렸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호씨는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단원이다. 2001년 창단할 때 휠체어 바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이런 이름을 지었다. 9명의 단원들은 호씨처럼 대부분 중증장애인이다. 뇌병변 장애인이 6명으로 가장 많다. 나머지는 지체장애인·지적장애인이다.

호씨는 3년 전 극단에 입단했다. 내성적인 호씨를 보다 못한 동생이 연극을 권유했다. 처음엔 무대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얼굴 근육을 조절할 수 없어 대사 없는 단역으로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다. 사람들을 향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노래방이다. 일주일에 한 번 노래방에 가 두 시간씩 노래를 불렀다. 혼자 갔다. 1년 넘게 연습을 하자 목소리가 커지고 발음이 좋아졌다. 1년 반이 지나서야 대사가 있는 단역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연극은 강요받지 않은 재활”이라고 말했다.

“찰싹찰싹” 호씨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연습실 전체로 퍼질 정도였다. 화내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뇌가 좋지 않은 탓에 가만있으면 그의 안면 근육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올라간 입술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턱 때문에 항상 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뺨을 때려서라도 근육을 풀어야 화내는 모습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호씨는 이날 연습 중간중간에 계속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단원들은 연극을 통해 신체적인 장애와 정신적 아픔을 함께 치유한다. 부산 경상대에서 방송연예과에 다니던 김선영(23·여)씨가 ‘휠’에 전화를 건 올해 1월.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대신 김씨를 키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울증까지 얻었다. 그는 “마지막 탈출 기회로 극단에 들어왔다”며 “혼자 지내지만 연극이 있어 행복하다”고 웃었다. 뇌병변 3급인 김씨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이제 힙합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김씨는 요즘 인터넷 발음 동영상을 보고 입 모양을 따라 하며 발음연습에 한창이다.

휠 단원들은 직업 배우들이다. 주변에서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장애인들이 연극한다고 나선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단원들은 연극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그들에게 무대는 ‘장애가 장애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꼬박 8시간을 연습한다. 공연이 임박하면 밤을 새운다.

송정아(36·여·뇌병변 1급) 단장은 “연극을 통해 과거의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으니 이제는 일반인들의 시선을 치료할 차례”라고 말했다. 호씨는 “편견은 어쩌면 장애인 스스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휠’은 아마추어 극단이 아니다. 대학로 극장이나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에서도 공연했다. 9년간 모두 96회 공연했다. 5월 부산국제연극제에서 특별상을 탔다. 올해 2월 노동부로부터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돼 한 사람당 월 70만원을 받는다. 공연에 필요한 비용은 개인 후원자에게서 조달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쪼들린다. 올 10월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2009 세계장애인문화예술축제의 개막식 축하 공연에 출연할 예정이다.  

강기헌 기자·최예나 인턴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활동 중인 장애인 극단들

◆쿵따리유랑단

- 가수 강원래(41)씨가 단장이며 시각·청각 장애인 30여 명으로 구성. 80%는 공연 경험이 없는 사람들

- 지난해 4월 결성, 30회 공연. 주로 보호관찰소에서 공연

- 보호관찰소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게 목표

- 2년 후 활동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예정

◆에파타

- 히브리어로 ‘열려라’는 뜻. 1993년 창단한 뒤 2년 만에 문 닫았다가 2002년 재창단

- 20명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청각장애인 극단

- 2002년 후 ‘배비장전’을 비롯한 전통극 위주로 9회 공연

- 배우의 수화를 자원봉사자가 관객에게 말로 전달

◆ 토끼업고가는거북이극단

- 지난해 9월 기혼여성 장애인 15명이 창단. 청소년에게 인형극 공연

- 황원경(38·여) 단장 “장애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시작했다.”

- 10월 서울시·제주도가 주최하는 세계장애인 문화예술축제에서 ‘내 꿈은 반쪽이 아니야’를 공연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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