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6) 서편제 신드롬

드디어 '서편제' 가 개봉됐다.

첫 촬영을 시작한 지 6개월 반만인 93년 4월 10일. 서울 개봉관은 단성사 한곳으로 결정됐다.

애당초 나는 흥행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게 목표의 전부도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한번 해본 것 뿐이란 생각 때문에 '서편제' 라고 개봉날이 유별날 것은 없었다.

5만~6만명 들면 다행이겠거니 했다.

개봉 첫날부터 나의 그런 예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객석의 절반이 비었을 정도로 썰렁했다.

"2~3주 가면 간판을 내리게 생겼군. " 이태원 사장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변이 일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입선전' 이 번져 객석 점유율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때맞춰 극장을 찾은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은 청와대에 이 영화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5월 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회견실에서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서편제' 시사회가 열렸다.

"내가 본 영화중 가장 감명 깊은 영화다. 우리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외국영화들이 무슨 걱정이냐. " 이날 영화를 본 김대통령의 격려말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이날 감사의 표시로 김수철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대통령에게 증정했다.

나는 이날 청와대 시사회가 결과적으로 '서편제' 의 예상밖 흥행 성공에 어느 정도 기폭제가 됐다고 확신한다.

이후 정치인과 각계 유명인사들의 관람이 줄을 잇자 '서편제' 는 꼭 보지 않으면 안되는 신드롬처럼 돼 버렸다.

김수환 추기경과 지금의 김대중 대통령도 이때 '서편제' 를 관람했다.

이럴 때마다 '서편제' 는 매스컴의 표적이 됐다.

개봉한 지 넉달이 된 8월 9일. '서편제' 는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한국영화 흥행신기록을 이뤘다.

3년전 내 영화 '장군이 아들' 이 이룩한 67만8천9백46명의 기존 최고기록을 가뿐히 넘은 것이다.

'장군의 아들' 이 1백76일만에 세운 기록을 53일이나 앞당긴 것이었다.

매스컴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밀려드는 관객들을 보며 '국민영화' 가 탄생했다며 떠들썩했다.

이같은 '서편제' 열풍은 얼마 안 있어 해외로까지 번졌다.

그해 10월 중국이 처음으로 주최하는 제1회 상해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오정해) 을 수상한 것이다.

감독 데뷔 31년만에 처음으로 받은 국제영화제 감독상이었다.

나는 정말로 기뻤다.

강수연 (86년 베니스영화제.89년 모스크바영화제) 과 신혜수 (88년 몬트리올 영화제)에게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기면서도 "나는 여배우들 상이나 태워주는 감독이구나" 하는 자괴감이 없지 않았던 터였다.

물론 '서편제' 라고 다 잘되는 일만 있지는 않았다.

그해 6월 칸 영화제 본선 진출 좌절은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당초 칸 영화제를 목표로 이태원 사장과 의기투합했던 것인데, 이 작품의 예술성을 몰라주다니.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시키지 못한 게 내 불찰이었다.

"전위음악 같아요. " 그때 '서편제' 를 본 한 외국감독의 판소리에 대한 이같은 반응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상처이자 앙금으로 남아있다.

'서편제' 그후 6년. 나는 지금도 '서편제' 에 대해 일말의 후회는 없다.

맘껏 고민하고, 맘껏 찍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나는 무엇보다도 '서편제' 를 통해 '우리의 것' '우리의 소리' 에 눈뜬 10대 관객들에게 미래를 걸고 있다.

그들이 커서 다시 '서편제' 이상의, 진짜 우리 것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때 칸 영화제도 분명 놀랄 것이다.

글 = 임권택 감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