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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반 고흐展'을 보고] 유홍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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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3월로 들어서기 직전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파리를 닷새간 다녀왔다. 아무 조건도 일감도 없는 순수한 미술관 여행이었다. 내가 그렇게 여유를 부린 것은 지난 1년간 중앙일보에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를 쓰느라고 인이 박혀버린 북한에 대한 인상을 이제 그만 벗어던지기 위한 새로운 자극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굳이 파리를 택한 것은 그랑팔레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반 고흐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며, 결국은 그 감동을 혼자 느끼기엔 너무도 아쉬워 이렇게 천성을 속이지 못하고 여행기를 쓰게 됐다.

서울에서 듣기에 이 전시회는 반 고흐의 생애 마지막 지지자이자 의사였던 가셰 박사 (1829~1909) 의 소장품 전시회로, 연일 만원을 이루면서 최근에는 이 전시회를 계기로 한 차례 가짜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 혐의를 다름아닌 가셰 박사가 받고 있다고 하여 더욱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파리에 있는 벗 홍세화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에게 입장권을 예매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전시회 (4월26일까지) 의 정식 명칭은 '세잔과 반 고흐의 친구인 가셰 박사' 였다. 가셰 박사는 파리 동북쪽 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시골 마을인 오베르 - 쉬르 - 와즈에 살고 있던 의사였다. 그는 그림을 아주 좋아하여 당시 세상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을 지지하며 세잔.르느와르.피사로.반 고흐 등의 작품을 많이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소장품을 그대로 베껴 그려보면서 그림의 묘미를 즐기곤 했다.

전시의 초점은 역시 반 고흐에 있었다. 고흐는 생의 마지막 70일을 바로 가셰 박사의 동네인 오베르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마지막 예술혼을 불살라 하루 한 점씩, 70일간 70점의 작품을 남기고는 세상을 떠났다.

'자화상' '가셰 박사의 초상' '오베르 교회' '코르드 빌의 농가' …. 이런 명작들이 여기에서 제작되었고 또 가셰 박사의 소장품이 되었다.

고흐의 작품은 언제 보아도 영혼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혼의 언어를 잡아내려 몸부림치다가 끝내는 정신병을 일으켰다. 1888년 12월 첫번째 발작에서 깨어났을 때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기를 바란다" 고 했다.

이후 고흐는 격심한 우울증과 망상에 시달리다가도 탈진된 상태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신이 맑아지곤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그랑팔레 전시장 한 쪽에는 반 고흐 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X레이로 투시한 사진등, 붓 자국을 몇십배 확대한 사진, 그가 사용한 캔버스와 물감의 성분을 분석한 자료 등이 마치 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실처럼 판넬에 제시돼 있었다.

그러나 진위를 감정하는 최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사람의 눈이며, 내 눈에는 가셰 박사의 모사본이라고 의심할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흐의 작품을 보면서 줄곧 우리의 이중섭을 생각했다. 고흐와 중섭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고흐는 37세에, 중섭은 40세에 요절한 천재화가였다. 둘다 정신병을 앓다가 끝내는 그로 인해 죽었다. 두 분 모두 예술적 창작열이 상상을 초월하여, 고흐는 생애 마지막 3년간 약 4백점의 작품을 남겼고 중섭은 피난시절 그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유화.은지화.드로잉을 약 3백점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분 모두 대상을 통해 영혼을 담으려는 강렬한 표현욕을 갖고 있었고, 생전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사후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고흐와 중섭에게 차이가 있다면, 고흐는 어찌됐든 평온한 세월 속에 동생 테오와 가셰 박사같은 지지자가 있어 언제든 맘껏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섭에게는 그럴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에겐 전쟁과 피난과 가난과 질병과 이별이 있었다. 그는 극심한 재료의 궁핍으로 캔버스에 그린 유화를 단 한 점도 남기지 못했고, 대부분 미군부대를 통해 나온 종이 위에 그린 것이었다. 물감도 오일 물감이 아니라 에나멜 페인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담뱃갑 속의 은박지 종이에 철필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생각하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만약에 중섭에게도 테오나 가셰같은 후원자가 있었더라면…. 그래도 나는 지금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 특별전' (9일까지)에 몰리는 인파를 보면서 우리에게 중섭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나는 내친 김에 세화의 자동차를 타고 오베르를 찾아갔다. 오베르 시골마을은 백년 전이나 거의 변화가 없어서 고흐가 세들어 살던 작업실, 그가 그린 오베르 읍사무소와 교회 같은 건물들이 그대로 있었다.

마을 한 쪽에는 반 고흐 공원이 생겼는데, 여기에는 자드킨이 만든 고흐의 동상이 마치 꺼벙한 미술 병사처럼 표현돼 있어 엷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베르 교회 윗쪽 언덕엔 공동묘지가 있고, 그 한 쪽엔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누워 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가셰 박사 집 덩쿨나무로 덮어놓은 것이 여태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묘소 윗쪽 구릉에는 밭고랑이 깊게 파인 밀밭이었는데, 여기가 그 유명한 '호밀밭의 까마귀' 를 그린 현장이었다. 그날도 까마귀는 여전히 그렇게 떼지어 날고 있었다.

나는 다시 중섭을 생각했다. 그리고 세화에게 올봄 서울에 오면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중섭의 묘와 제주도 서귀포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을 그린 '이중섭거리' 를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는 노을로 물든 오베르 평원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이 아름다운 두 영혼을 마음 속으로 기렸다.

유홍준 <미술평론가.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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