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마샤오춘·고바야시 "좌절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집념의 도전자 마샤오춘 (馬曉春) 9단과 고바야시 고이치 (小林光一) 9단. 한사람은 중국인이고 한사람은 일본인이다. 한국의 천재기사 이창호9단과 조치훈9단에게 도전하여 포말처럼 부서지고 말았지만 약속이나 한듯 다시금 도전해오고 있다.

승리한 한국은 기분이 좋다. 한국바둑이 세계를 제패했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줄기차게 덤벼오는 마샤오춘과 고바야시의 투혼에 감탄과 함께 가슴 서늘한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이창호대 마샤오춘 = 마샤오춘은 2일부터 이창호9단과 LG배세계기왕전 결승5번기에 들어갔다. 96년 이후 이9단에게 악몽의 10연패를 당할 때 사람들은 마샤오춘도 그의 선배 네웨이핑 (攝衛平) 9단처럼 무대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네웨이핑은 중국 정부가 기성 (棋聖) 칭호를 내릴 정도로 막강한 실력자였으나 조훈현9단과의 생애의 일전에서 패한 뒤 일사천리로 무너져버렸다.

마샤오춘은 그러나 지난달의 삼성화재배에서 결승에 진출하여 이창호와 박빙의 승부를 연출했다. 비록 2대3으로 패하긴 했으나 한때는 2대1로 리드하는등 언제 10연패를 당했느냐 싶을 정도였다. 그 마샤오춘이 이번엔 LG배에서 다시 이창호에게 도전해온 것이다.

피아노를 즐기는 짙은 감성의 소유자인 마샤오춘. 그러나 그는 여린 사람이기는 커녕 "패배는 어제의 일, 이번엔 내가 이긴다" 며 LG배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다.

실력의 열세를 절감하면서도 나는 이길 수 있다고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며 잡초처럼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 조치훈대 고바야시 고이치 = 고바야시9단은 지난 2월25일 끝난 일본최대기전 기성전도전기 제5국에서 조치훈9단을 102수만에 불계로 꺾고 막판을 넘기며 스코어를 2승3패로 바꾸어놓았다. 비록 열세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만만치않은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에 앞서 열린 일본랭킹 4위 기전인 '10단전' 에서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에게 아슬아슬한 반집승을 거두고 도전권을 쟁취했다.

처음에 고바야시9단이 기성전의 도전자가 됐을 때 바둑계는 "질기다" 며 그의 끈기에 감탄했다. 그는 86년에 조치훈을 꺾고 일본의 1인자가 된 인물이다. 이후 '지하철바둑' 이란 혹평에도 자신의 실리적이고 무미건조한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며 근 10년동안이나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 와신상담하며 칼을 갈아온 조치훈에게 꺾이면서 급속한 내리막길과 함께 무관으로 전락하자 고바야시의 시대는 드디어 끝난듯 보였다.

그러나 고바야시는 2년여동안 이리저리 밀리며 아내의 상을 치르는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서 랭킹1위 기성전의 도전권을 잡았다. 그리고 무적 조치훈과 이틀바둑을 두면서도 2승3패까지 버티고있고 그 와중에 10단전 도전권도 쟁취한 것이다. (기성전 6국은 10~11일) 한국바둑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잡초류' 란 독특한 스타일로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던 일본과 중국바둑을 잇달아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제는 잡초류란 이름도 더이상 한국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 깊은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 덤벼오는 35세의 마샤오춘과 47세의 고바야시의 모습은 마치 총에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