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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향기 피어나는 남도의 작은섬 소록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남녘에서 달려오는 봄. 땅위로 머리를 내민 보리는 파릇파릇함으로 봄을 노래한다. 동백.산수유.매화도 며칠후면 봄 기지개를 켜고 빨강.노랑.연분홍으로 요란하게 치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연의 봄. 남해의 한 섬에 가면 '인간이 만든 봄' 을 실감할 수 있다. 소록도 (小鹿島.전남 고흥군 도양읍). 새끼사슴 모양인 이 섬은 '절망의 땅' 에서 '지상 낙원' 으로 운명을 바꾼 섬이다.

국도 27호선의 종점인 녹동. 녹동에서 손에 잡힐듯이 아담한 섬이 나타난다. 사람과 자동차를 실어나르는 관광선을 탄지 5분이 지났을까. 섬 입구에 들어오니 '한센병은 낫는다' 는 글귀를 담은 석조물이 눈에 띈다.

한때 나병으로 불렸던 한센병은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발가락.코 등이 문드러져 없어지는 병. 선착장에서 소록도공원까지는 2㎞. 나그네에게는 여기까지가 출입 가능한 지역 (1번지) 이다. 이 섬의 나머지 절반 (2번지) 은 병원이 세워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영역이다.

안내소를 지나 우체국.읍출장소를 가는 도중 각 종교기관의 수양공간이 나타난다. 원불교교당.성당.교회 등이 즐비하다.

"소록도는 하나의 국가였어요. 양계등 생활기반은 물론 병원.교회.학교.교도소까지 갖춰 자체 운영이 가능했으니까요. 소록도 주민들은 번 돈을 쓰지않고 저축해 요즘 부자소리를 들어요. " 고흥군청 장세원 홍보계장의 말이다.

해풍에 살랑이는 소나무숲과 아낙네의 찬거리 마련장인 갯벌, 병원을 지나니 마침내 소록도공원. 종려나무.편백.차나무.능수매화.등나무 등 5백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공원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눈물과 땀이 서려 있어요. 6만명의 몸도 성치않은 사람들이 36~40년까지 6천평의 땅을 가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금도 환자들은 나무들을 돌봅니다" 소록도 병원의 김학모 (44) 씨는 공원의 화려함뒤에 감춰진 애환도 알아두라고 말한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면 황금빛을 토하는 황금편백. 하얀 색깔로 봄을 속삭이는 산다화. 매화.철쭉.등나무터널도 갖가지 화려한 색깔로 단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돌과 나무로 십자가와 못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한센병 환자들과 평생을 함께 한 성인들의 공적비도 관심을 끈다.

"보리 피리 불며 봄언덕 고향 그리워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때 그리워 필 닐리리…" 언덕쪽 너럭바위는 한센병 환자로 주옥같은 시를 남긴 한하운의 시비. 함경도 태생으로 귀향을 바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다.

공원 입구에 위치한 생활자료관은 1916년 소록도에 병원이 설립되면서 생긴 세월의 궤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장소. 사진.의복.치료도구.생활도구 등 이전의 생활상이 정리되어 있다.

병원쪽으로 길을 재촉하다 왼편을 내려보니 을씨년스런 시멘트 건물 2동이 보인다. 이 곳은 바로 감금실과 검시실. 감금실에서는 '죄수아닌 죄수' 로 속박당한 이들의 울분이, 검시실에서는 덧없는 생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다.

검시실 뒤편 단종 (斷種) 수술대에서는 일제치하에서 자식의 꿈을 상실한 이들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깡통 들던 손이 씨앗뿌리는 손으로, 문전걸식으로 굽신거리던 허리가 일하는 허리가 돼 '살만한 곳' 으로 변신한 소록도. 집집마다 담장이 없는 소록도엔 절망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봄향기가 벌써부터 물씬하다.

송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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