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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요즘 시 한편 읽으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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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바람 잘 통하는 구석방. 오후 두시. 이곳에 앉아 좋은 시를 마음에 적시는 건 어째 이다지도 마음이 편할까. 왠지 안심이 되고, 힘들고 슬픈 일들이 다 녹는 기분이다. 비누거품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시간이 때로 무섭지만 이렇게 책을 읽고 열중하는 시간은 감미롭기만 하다. 비로소 책과 연애하는 시간. 책이라도 들고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뜨겁고 지루한 여름날. 아무리 고단해도 자신의 감성과 지성을 예민하게 닦을 기회를 늘 가질 것. 혼자 있는 시간. 시를 읽고 책읽는 다섯 시간, 닷새가 5년의 삶을 바꿔가지. 그럼, 그럴 수도 있다.

"시를 안 읽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을까? 시를 안 읽고 어찌 인생을 알까" 란 내 말에 가슴이 찔려 시를 읽고 인생이 깊어졌단 친구도 봤다. 그러나 점점 시와 멀어지는 세상. 분명 좋은 시는 감성을 키우고, 감정을 정화시키며, 상처를 치유한다는 점에서 돈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영적 음식이다. 시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잘 쓴, 좋은 시들을 자꾸 접하게 되면 쉽고 삶과 언어의 신비함까지 맛보리라.

언젠가 아는 분들과 식사 중 최근의 강력범죄에 대한 염려를 하였다. 조용히 듣던 한 방송국 부장께서 "강력범죄는 시를 안 읽어 생기는 거예요"란 말에 처음 뵙는 분인데도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어머, 시를 좋아하세요? 혹시 쓰고 계시나요?" "우리 시절은 모든 학생이 아마추어 시인이었지. 지금과는 달라. 시를 읽고 썼어. 한번 범죄자들한테 설문조사해봐요. 자랄 때 시를 읽어봤나 안 읽어봤나? 시를 접하지 못했을 거야."

이 자리에서 한 시인협회가 라디오 방송에서 시 한편 읽을 때마다 저작료 5만원씩 내라고 해서 시소개 코너를 없앴단 얘길 들었다. 인쇄물의 경우는 반드시 재수록료를 받아야 하지만,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시마다 일일이 저작료를 낼 수 있을까. 만사 원리원칙으로 얽매여 융통성없이 흐른다면 세상은 더 삭막해질 것이다. 그 협회에 소속되지 않는 시인들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았다. 결국 프로마다 시 코너가 없어지고 거의 시가 흐르지 않는다. 시에 관심이 사라지는 이유며, 삶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 시인협회가 사려깊게 생각했음 좋겠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시를 듣고 누군가 인생이 바뀌고 출판시장엔 작은 활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선 수업시간에 어린이에게 시를 외우게끔 한다. 글짓기 수업을 10년 가까이 가르쳐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나도 안다. 프랑스의 자존심이기도 한 시인 랭보 100주년 기념으로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랭보 시를 베껴 편지쓰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조선시대엔 시를 쓰고 그림과 글씨를 잘해야 관리가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대통령과 고위관리, 국회의원 누구라도 시를 알고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 '진달래꽃'을 지은 시인 이름을 물었을 때 한 젊은이가 가수 "마야"라고 대답을 했다는데, 이것은 우리 국민 수준의 한 단면이다. 어떻게 국민시인 김소월도 모르는가. 입시 위주의 얄팍하고 허술한 교육과 무식한 풍토에서 중국으로부터 역사왜곡이나 당하는 건 이미 예견된 일인지 모른다. "정체성없는 문화는 정복 당한다." 이 말을 깊이 새기고 싶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식당에서 밥 한끼 값이면 시집을, 두끼 값이면 괜찮은 문화서적을 사볼 수 있다. 그리고 도서관도 있잖은가. 어쩌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시를 읽고 역사.문화.철학 등 인문학을 소홀해서는 안 되리라. 사실 세계화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정체성 강화에 애써야 하는 의미일 것이다.

신현림 시인

◇약력 : 사진가.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출간, 박물관 기행 산문집 '시간창고로 가는 길', 영상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