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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씬 레드라인'…낮은 목소리로 전쟁참사 고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지난 10일 발표된 올 아카데미상 후보작 중에는 '의외의 복병' 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지난달 열린 골든 글로브상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던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 이 최우수작품상 등 무려 7개 부문에 오르는 '깜짝쇼' 를 연출한 것이다.

이런 결과는 골든 글로브상을 뽑는 할리우드의 영화담당 외신기자들을 골탕먹이기에 충분한 일. 이같은 '안목의 큰 편차' 는 미디어에 갇힌 현대인을 풍자한 '트루먼 쇼' 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짐 캐리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골든 글로브에선 강세였으나 이번엔 지리멸렬. 졸지에 '씬 레드라인' 은 다음달 21일 있을 제71회 아카데미영화상에서 뜻밖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됐다.

이같은 일이 국내로도 과연 이어질까. 지난 13일 액션대작 '쉬리' 등 5편의 한국영화와 맞붙은 '씬 레드라인' 은 개봉 5일동안 서울 6개 개봉관에서 객석점유율 80%를 기록, 순항을 예고했다.

이런 선전에 힘입어 배급사인 20세기 폭스코리아는 27일부터 서울 15개 (전국 38개) 극장으로 확대개봉할 계획. 이처럼 호기를 만난 '씬 레드라인' 은 오랜만에 2차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란 점에서 곧잘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가 전쟁의 참상을 극대화해 관객들에게 휴머니즘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반면, '씬 레드라인' 은 관객의 감정을 강요하진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그냥 보고 여러분이 판단하세요' 라고 하는 쪽이다.

'씬 레드라인' 도 물론 '라이언 일병 구하기' 처럼 귀청 떨어지게 하는 전투장면은 나온다. 다만 초월적인 시각에서 죽은 자 모두에게 연민을 갖게하는 맬릭 감독의 허무주의적 사유는 이 작품을 이전 전쟁영화와는 반대편에 세운다.

이 한편의 서사극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과달카날섬을 놓고 벌이는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배경. 영화는 쪽빛 해안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낙원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풀어가는 스타일은 정반대다.

'대치의 미학' 이랄까. 목가적 풍광과 전투,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와 무관심한 원주민, 아름다움과 공포, 야만과 서정, 사랑과 배신 등. 이런 병립을 통해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평온과 광기가 모호한 경계 ( '씬 레드라인' 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를 이루는 인간사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켄터키 출신 병사 위트 (짐 카비에젤) 는 이 영화의 대변자. 그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어떤 한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함께 깃들 수 있는가" 를 줄곧 반문한다.

존 트라볼타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앙상블 연기가 장점. 그래도 210고지 점령을 명령하는 고든 톨 중령역의 닉 놀티 (57) 의 연기가 돋보인다.

오직 승리만이 목표인 냉혈한이지만 깊게 패인 주름살 사이로 보이는 고뇌의 흔적은 인상적. 시종 냉소적인 하사 웰시 역의 숀 펜도 눈여겨 볼만하다. 더불어 전쟁음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인간의 내면세계로 파고든 한스 짐머의 음악도 감동적이다.

'천국의 나날들' 이후 20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맬릭 감독은 74년 이후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는 '은둔자' .이 고고함 때문인지 그는 영화 속에 '설교조' 의 나레이션과 모놀로그를 남용, 왠지 거부감을 주는 게 이 영화의 흠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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