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번째 시집 '의자와 계단'펴낸 김춘수 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꼭 2년만에 18번째 시집 '의자와 계단' 을 내놓은 김춘수시인을 서울 강동구 명일동 자택으로 찾았을 때, 문을 연 이는 일흔 일곱의 노시인보다는 노철학자였다.

보름에 한 번씩 이발소에서 손질한다는 턱수염과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예리한 눈빛. 시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의자' 는 노년의 안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계단의 속성이 삶의 모순적인 역동성을 상징한다면, 의자는 그같은 모순.갈등.비극에서 한시나마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도구일 터. 그러나 시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현실에 의자는 없어요. 의자없는 세상에 사는 비극,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지요. " '저것이 의자인가 하고 가봤더니 그것은 ㅡㅣㅈㅏ, 앉았다 간 누군가의 궁둥이 자국' 이란 싯귀는 그같은 인식의 함축. 동시에 형식실험의 극한에서 다시 의미의 세계로 내려온 시인의 계단이다.

60년대 초부터 언어에서 일체의 의미를 제거하다 못해 음소로까지 분해해 나간 실험에 몰두한 시인이 90년대 초, 연작시 '처용단장' 의 완결로 그 절정에 이르렀음은 주지의 사실.

"언어로 음악의 악보같은 것을 그리려했다" 는 시인의 말대로 '표제음악 - 절대음악' 에 대한 문학적 대칭을 겨냥한 그 실험은 결국 "사람의 언어가 아닌 이전단계, 동물의 언어" 에 이르렀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가 아닌 단계. 그래서 시인은 계단을 내려온다. 시인이 의미의 세계로 내려딛은 걸음은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 50년대 '꽃' 연작시절처럼, 철학적 의미로 회귀한다.

"이전의 시들이 언어와 형식에 대한 탐구였다면, 이번 시집은 주제에 강조가 있어요. 내 인생관을, 그동안 몸에 배인 방식대로 토로한 것이지요. " 그 인생관이 바로 인간존재의 비극성. 무엇이 그를 여기에 다다르게 했을까. "나는 역사를 믿지 않는다" 고 운을 뗀 시인은 "이제까지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다면,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 고, 젊은 시절 독서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볼세비키 혁명에서 이탈한 망명객의 말이다. "역사는 허망한 낙관주의" 라는 그의 불신은 정치에 관여했다 상처입은 80년대초의 경험보다 한참 오래전, 식민지 지식인 청년시절로 거슬러 간다.

이제 "시로써 내 길에 새 전망이 훤히 트이기까지는 한참이 걸릴 것" 이라는 시인은 "시보다는 희곡이나 소설을 써 볼 것 같은 예감" 을 털어놓는다. 그 예감의 실타래 끝에 스승격인 청마 유치환을 회장으로 모시고, 극작가 박재성.음악가 윤이상 등 친구들과 함께 연극공연을 하던 해방직후의 고향, 경남 통영의 기억이 따라나온다. 처음과 끝은 다시 이어지되, 시인에게 안주 (安住) 는 아직 멀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