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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솔직히 고향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워요. 세뱃돈을 나눠줘야 할 아이만도 20명이나 되거든요. " 일전 한 모임에서 한 주부가 걱정스레 털어놓자 주변에 모여 앉은 이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는 "형편이 어려워진 막내동생네는 아예 이번 설엔 고향을 못 오겠다고 하더라" 고 말했다.

다른 친척들은 너나 없이 세뱃돈을 쥐어줄 텐데 혼자서 안 줄 수도 없고 줄 형편도 못돼 아예 고향을 오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설빔으로 부모님이 사주신 운동화를 행여 밤새 누군가가 집어갈까봐 머리맡에 올려둔 채 밤새도록 떡국 떡을 썰어대는 어머니의 칼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던 섣달 그믐밤의 추억은 어느새 세뱃돈 걱정으로 밀려나 버렸다.

줄어든 수입만큼이나 빡빡해진 살림에 제수용품 값조차 뛰어 아이들 몫으로 세뱃돈을 떼어 두기도 쉽지 않아진 탓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40~50대 직장인들은 10명 중 8명꼴로 세뱃돈에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풍속연구가 박영수 (朴英秀) 씨에 따르면 새해 첫날 세뱃돈을 주는 관행은 중국에서 시작돼 점차 베트남.일본 등 인근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설이 되면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 는 뜻으로 행운의 색인 붉은 색 봉투에 약간의 돈을 넣어 주어 새해 첫 출발을 기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배하러 온 아이에게 유과나 과일 같은 간단한 음식을 차려 세배상을 내렸다고 한다.

가끔 여자아이라면 골무.실패 같은 바느질 도구를, 남자라면 지필묵 중 한 가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30년대부터 생겨났다는 세뱃돈 풍습도 반드시 봉투에 넣어 '책값' '붓값' 이라고 쓸 곳을 적어 건네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풍습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설날 세배를 받은 어른들은 으레 주섬주섬 지갑을 열어 세뱃돈을 꺼내 든다.

더욱이 체면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네인지라 일가 친척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다른 이보다 적은 돈을 아이에게 건네기가 그리 쉽지 않다.

미리 대충 예산을 세워뒀다가도 곁에서 하는 것을 보고 '울며 겨자먹기' 로 따라가는 경우도 많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세배 후 웃어른이 내리는 덕담보다는 세뱃돈이 더 관심거리다.

그들끼리 '올해 수금액' 이 경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절을 제대로 올리지도 못하는 나이 어린 꼬마까지 '염불보다는 잿밥' 식이 돼가고 있다.

하기야 '사촌도 남' 이라며 직계가족밖에 모르는 요즘 세대들이 그나마 설날 하루라도 친척을 챙기는 것이 다행 (?) 이라고 항변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의식이 쌓여 '명절 무렵 인사치레로 주고받은 적은 돈' 인 '떡값' 이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돈' 인 '전별금' 의 관행을 불러 온 것은 아닐는지. 근래 들어 우리의 선물문화는 급속도로 '현금선물' 이 확대돼 가고 있다.

생일선물.졸업선물은 물론 심지어 집들이에 가서도 현금봉투를 내미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현금선물의 편의를 내세우는 이들은 '불필요한 선물' 은 받는 이에게 짐만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받는 이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서 살다 온 이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현금 선물을 주고받는 이들이 없더라" 고 전한다.

사회 전체가 '아무때나 돈을 주고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한 '떡값' 이나 '전별금' 과의 결별은 불가능하다.

변화관리전문가로 꼽히는 구본형씨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 에서 개혁이나 자기혁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생활과 일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우리의 고유한 선물문화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아래서 모두 허리를 졸라매야 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그릇된 현금 선물 문화와 결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올 설에는 우리 함께 세뱃돈을 추방해보자. 그래서 그리운 고향집을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는 이들이 없는 설날로 만들자. 대신 온 가족이 잊을 수 없는 명절을 만드는 궁리를 해보자. 아이 한명 한명을 떠올리며 이들에게 꼭 맞는 덕담을 준비해가는 것은 그 첫 걸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추억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백발이 성성해진 후에도 마음 속에 남게 될 '잊지 못할 추억' 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홍은희 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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