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금융포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9호 33면

‘그동안 손해 좀 본 것 같다.’ 한·일 협력 강화를 슬로건으로 한국과 교류해온 일본 제조업체들, 속으론 십중팔구 밑졌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말이 ‘교류’지, 일본이 한국에 돈을 빌려주거나 기술(낡은 것이라도)을 넘겨준 경우가 많다. 일본이 한국에 한 수 가르쳐 줬던 셈이다. 일본 대기업들이 한국을 하청 생산기지로 이용할 만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그러다 어느새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막강한 라이벌로 성장했다. 한국의 제조업은 더 이상 지원 대상이 아니라 경쟁 대상이라는 게 일본 기업인들의 시각이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일본의 소니나 후지쓰에 뭐 아쉬운 얘기할 게 있겠나. 이쯤 되면 과거처럼 제조업에서 한·일 협력을 촉진하려 해봤자 더 얻을 게 별로 없다. 친목이나 사교 정도로 끝나기 쉽다. 매년 양국을 오가며 회의는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구체적인 성과나 어젠다는 딱 부러지게 나오질 않는다. 제조업 중심의 한·일 협력은 슬슬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앞으로 양국 경제협력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까. 뭐니뭐니 해도 금융이 아닌가 싶다. 금융 분야에선 서로가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양국 은행들의 예대비율을 보자. 대출을 예금으로 나눈 이 수치가 너무 높으면 은행의 경영상태가 불안하고, 너무 낮으면 돈 벌이가 시원찮다는 뜻이다. 우리 은행들의 예대비율은 요즘 100% 언저리다. 그것도 열심히 관리해 많이 낮춘 것이다.
반면 일본의 은행들은 70%대라고 한다. 일부 지방은행은 그보다 더 낮다고 한다. 우리는 예대비율이 너무 높아 위태위태한 반면 일본은 돈 쓰겠다는 곳을 찾지 못해 갑갑해하는 처지다.

그런 양국 은행이 협력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우리는 저금리 엔화자금을 들여올 수 있고, 일본은 새로운 자금운용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크게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때 그로기 상태로 몰렸던 우리에게 일본과의 금융 협력은 미국 일변도의 의존을 분산시키는 방편도 된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무엇보다 돈을 가진 쪽이 쓰려는 쪽을 신용해야 한다. 풍부한 저축을 해외에서 운용하려는 일본의 개인투자자(‘와타나베 부인’)들의 눈길을 끌 만한 계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양국이 새 협력모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의심 많은 일본인들이 믿고 투자하도록 해주면 상부상조의 여지는 충분하다.

오늘 일본 총선에서 승리가 확실시되는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도 아시아를 중시하겠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의 새 정권과의 첫 한·일 정상회담에선 금융 협력을 주요 어젠다로 삼을 만하다. 마침 우리의 국제금융센터 주도로 ‘한·일 금융포럼’이 태동을 앞두고 있다. 일본 사정에 밝은 한택수 이사장의 발의에 호응해 양국 금융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이게 앞으로 양국 금융계의 현안을 다루는 중추적 협력기구로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