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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理는 기침하고 세수하고 밥먹는 자리에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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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8면

주자학의 이상은 ‘합리(合理)’다. 이 말의 고전적 용법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은 다만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이나 이성 중심의 전통, 혹은 경제적 계산의 적절성을 뜻하게 되었으니, 그 서구적 지배로 인해 ‘합리’는 본래의 장엄한(?) 영원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퇴계, 그 은둔의 유학 <8>-合理

본래의 장엄한 뜻을 잃은 개념들
덧붙이자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자어의 대부분은 19세기 일본이 주도한 서양 문물의 번안어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 한자어 개념을 알자면 옥편을 뒤질 것이 아니라 영어사전을 뒤져야 마땅하다. 식민치하에서 시작된 언어적 전환은 문물과 제도뿐 아니라 개념적 환경과 그로 인한 무의식적 습성까지 서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새로 만든 신조어라면 충돌은 덜하다. 그러나 지금의 ‘합리’처럼 전통의 한자어를 차용했을 경우 예전의 의미는 지워지고 새 주인의 얼굴과 목소리만 부각된다. 지금 경제(經濟)를 ‘정치’로 읽는 사람이 있는가. 그 말은 오랫동안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뜻했으되, 지금은 상업과 금전에 관련된 ‘이코노미(economy)’로만 이해되고 유통된다.

이렇게 의미가 전환되고 가치가 뒤집힌 어휘들은 부지기수다. 거기 자신의 세계관과 비전까지 저당잡혀 버린 것도 많다. 합리처럼 자연(自然)이나 도덕(道德)이 그 대표적 예들이다. 그래서 전통을 향해 가는 길은 서구의 지배가 덮어버린 개념의 지층을 탐사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 개념의 고고학 작업에 별다른 도구가 없다. 해석들은 기초적이거나 서구의 개념과 문맥에 이미 물들어 있다. 그 더께의 방해물들을 헤치고, 원전들을 생짜로 맨땅에 헤딩하면서 헤쳐나가야 한다.

산경(山徑)은 모색(茅塞)으로 뒤덮여 있다. 말은 어렵고, 함축은 깊으며, 체험의 깊이는 입을 떼기 어렵게 한다. 그 장악이 있다 해도 그 실질을, 리스크를 감수하며 현대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고, 소통의 다리를 놓아가는 걸음은 팍팍하고 이마에 땀방울은 한가득이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은 어렵다. 혹, 이 작업이 성공한다면 전통의 사유는 현대의 편향을 반성하고 몰각된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빛과 목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익어간다
각설, 사설이 길었다. ‘합리’에 이르자면 당연히 이(理)가 무엇인지 짚이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 전모를 보여주자면 복합 도표가 필요하다. 저번 강의에 유교의 이념인 이(理)를 노장의 기(氣)와 대비적으로 계보학적으로 적어준 것이 그 한 항목에 해당한다. 사단칠정을 두고 율곡과 오랜 논란을 거친 것도 한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 그 ‘시공적 현재’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자성록』에서 퇴계는 남언경에게 그 지점을 이렇게 일러주고 있다. 짧은 글이라 전문을 번역해 본다.

“이 학문은 친구들이 서로 절차탁마 도와주어야 하는 것인데, 근방 사우(士友)들은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이 일에 전념할 수 없습니다. 그래 별로 나를 일깨워주는 바가 없네요. 우두커니 산속에 혼자 앉아서 날로 둔체(鈍滯), 막히고 아둔해지는 걱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예전 서울에서 어울리던 시절이 즐거웠지요. 그런데 그 시절 강론하던 것들이 대체로 모호하고 붕 떠있었던 것을, 그 잘못을, 근래 주자의 편지들을 읽고 구체적 이해가 열리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이(理)는 일상의 삶에서 양양(洋洋)히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가고 서고, 말하고 그치는 사이에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 관계, 그리고 주고받는 교제 속에서 평범하고 구체적으로(平實明白), 아주 작고 미세한 곡절에도 어느 때 어느 한 곳이라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것은 ‘눈앞에 뚜렷하되, 동시에 흔적 없는 신비 속입니다(顯在目前而妙入無朕)’. 초학자들이 이 일상의 역역한 이(理)를 버리고, 거창 심오하고 원대 아득한(高深遠大) 곳에서, 한방에 지름길로 이(理)를 대면 장악하려 합니다.

이는 (공자의 큰 제자였던) 자공도 못했던 것인데, 우리들이 할 수 있겠나요. 그래서는 추구와 모색의 노력은 크되, 결국 삶의 실질에는 망망하니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자의 선배인) 이연평이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도리(道理)는 전적으로 일상의 삶(日用處)에서 익어간다’고 했으니 그 말씀이 정말 씹을수록 맛집니다.”

빠른 팔놀림으로 기름띠 걷어내야
이(理)가 생각과는 달리 아주 가까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즉 기침하고 세수하는 현장에,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곳에, 가령 식탁 위, 생산 현장과 서류더미 속, 가게의 진열장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 ‘현현된 신비(體用一源 顯微無間)’는 강제된 규범도 아니고, 초월자의 의지도 아니다. 유교는 공감을 믿었기에 법률을 경시했고, 내재의 자연에 철저할 뿐 계시나 구원을 생각하지 않았다. 유가의 도리(道理)는 이를테면 특정한 위상 하에서 과정적 결과로 지시되는 어떤 것이다.

우주의 계기들이 서로 감응(感應)하듯, 상황과 계기들이 주어지면 행동의 반응과 선택이 준비된다.문제는 방해물이다. 가령 사물의 유혹, 세간의 의견, 성격적 편향 등 전문적 용어로 ‘기질(氣質)’이 그 자연발현을 제약한다. 예비된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영웅적 행동이나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명징한 정신과 돌파의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작업이 그렇듯이 이 일은 숙련을 요한다. 정신의 촉수는 자주 흐려지고 끊기며, 유혹은 다시 일고 객기(客氣)가 치성한다. 끊긴 주시를 다시 잇고, 성찰을 계속하지 않으면 다시 오래된 그 습관으로 회귀하고 말 것이다. 정황은 흡사 기름띠 덮인 바다 같다. 한두 번 물을 쳐내도 기름은 다시 몰려온다. 다시 기름띠에 갇히지 않으려면 빠른 팔놀림으로 물을 크게 치고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문득 기름띠는 옅어지고 시퍼런 바닷속에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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