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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α삭감 … 사상 최대 ‘예산 전쟁’ 시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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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 이달 초 정부 과천청사 기획재정부 예산실. 보건복지가족부 간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전날 전재희 복지부 장관의 ‘불호령’ 때문이었다. 전 장관이 복지부 예산요구에 대한 1차 심의 결과를 보고받은 뒤 간부회의에서 “실·국장들이 지금부터 예산을 얼마나 따오는지 두고 보겠다”고 통고한 것. 과천 관가에선 전 장관이 20여 년 전 노동부 실무자 시절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사무실로 보름간 출퇴근한 끝에 예산을 따낸 일화와 함께 “예산은 발품”이라는 전 장관의 지론이 회자되고 있다.

#2. 7일 정부와 한나라당의 예산 당정 회의. 무려 5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이례적인 매머드 회의였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선 “여기 오면 지역구의 예산 배정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오갔다. 김성조 정책위의장이 “세세한 내용보다 큰 흐름의 예산 방향에 대해 의견을 부탁한다”고 분위기를 잡았지만, 의원들은 ‘4대 강 살리기’ 사업 때문에 지역 사업 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를 집중 추궁했다.

사상 최대의 ‘예산 전쟁’이 불붙고 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과 장수만 국방 차관 사이에 불거진 ‘하극상’ 논란의 단초도 내년 예산 편성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선 필사적인 예산 확보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류성걸 예산실장의 사무실엔 예산 배정을 호소하는 국회의원들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올해 예산안 편성이 유독 홍역을 겪고 있는 것은 내년 정부 예산 규모가 올해보다 줄어들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 지난 4월 28조4000억원의 추경을 편성했다. 이 중 세출 증액이 17조2000억원이다. 그만큼 예산이 늘어난 셈이다. 그러나 추경은 비상시에 응급조치로 편성된 것이다. 예산당국은 금융위기가 진정되고 있으므로 추경과 같은 지출을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재정 적자를 억제하기 위해선 한시적으로 늘린 ‘위기 대응용 예산’을 줄이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예산 당국은 일단 각 부처의 예산(총 지출) 요구 규모를 올해 본예산(284조5000억원)보다는 4.9%(14조원) 많지만 추경을 포함한 예산(301조8000억원)보다는 1.1%(3조3000억원) 적은 수준으로 틀어막았다. 사실 각 부처의 예산 요구가 감소한 것은 외환위기 때도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최종 예산은 이보다 훨씬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예산 당국이 부처 요구 예산을 삭감하기 때문이다.

일선 부처는 좌불안석이다. 각종 사업은 잔뜩 벌여놓았는데 돈줄은 마르기 때문이다. ‘추경의 덫’에 빠진 셈이다.

여기에 4대 강 사업도 변수다. 4대강을 포함한 녹색성장 예산 증액 요구가 6조9000억원인데 정작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증액은 1조4000억원에 불과하다. 더구나 예산당국은 지난해 11월 정부가 긴급하게 더 늘린 SOC 예산 4조여원도 한시적으로 늘어난 예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래저래 도로·철도 등 기존 SOC 사업의 조정은 불가피하게 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국도나 지방도 등의 신규사업은 엄두를 내기 어렵고, 계속사업 일부도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SOC 건설을 임기 중 업적으로 선전하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 분야 예산은 대표적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관련 예산 증가율이 전체 예산 증가율보다 더 높지만 장애인 연금 도입, 보육비 지원 확대 등 신규 사업 상당수가 제동이 걸리는 분위기다. 늘어나는 예산의 상당 부분이 기초노령연금과 장기요양보험에 들어간다. 65세 이상 노령층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를 반영해서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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