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328.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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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그런데…. 한철규가 영동식당 술청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술청 안의 분위기는 금방 달라졌다. 경영주가 묵호댁으로 바뀌었다는 것 외에 영동식당 술청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조리대 위의 도마조차 옛날 있던 그대로였고, 탁자들도 그대로였다. 찾아오는 단골들의 면면도 예대로였다. 그런데 그 술청으로 한철규라는 사람이 들어서자, 분위기는 물을 뒤집어쓴 듯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고, 중구난방이던 대화들도 중단되고 말았다.

조여 앉았던 어부들 중에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기도 하였고, 간이의자 한켠으로 비켜나는 시늉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철규는 그러나 한 탁자 건너의 빈 자리에 혼자 앉았다. 승희는 술청 안으로 떠돌고 있는 어색한 분위기를 대뜸 감지하고 있었다. 같이 휩싸여 쏘다닐 때는 알아차릴 수 없었던 한철규라는 사람의 새로운 면목을 승희는 달라진 술청 안의 분위기에서 알아차렸다.

뜨내기로서가 아니라, 어엿한 도매상으로 대접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어부가 맥주병을 들고 그에게로 다가가며 수작을 건넸다. 나중에서야 그가 한씨네가 팔고 있는 간고등어 공급자라는 것을 알았다.

변씨가 터 놓은 거래선이었다. 맥주 한잔을 권한 그는 철규에게 귓속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어부들은 한철규를 만나기 위해 영동식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의 귓속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철규는 사내를 데리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섰다. 그제서야 배말자씨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건달들의 정체와 속셈을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배말자씨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갔었으나 응급실에 누워 있는 환자를 면회할 수 없었다. 병원측에서도 안정이 필요한 환자이기 때문에 직계가족 이외의 면회를 허락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친정식구들로 가장한 사내들이 복도에 진을 치고 그의 접근을 방해했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측과 건달들이 한통속이 되어 뭔가 사기극을 꾸미고 있다는 실증은 있었지만, 혼자인 철규로선 움치고 뛸 재간이 없었다. 먼저 그들의 정체를 알아 내는 것이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똥이었다. 그들을 알아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손톱만큼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부류들이란 인상이 강하게 들면서 더욱 궁금하고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그들은 배말자씨의 친정식구들이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그는 담당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의사의 태도는 따귀라도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더욱 얄미웠다.

그의 태도에서 사내들과 의사가 서로 짜고 벌이는 연극이란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병원과 피해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둘러싼 공갈범들과 사기꾼들의 풍속에서 전혀 예비지식이 없는 철규로서는 속수무책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젊고 영리해 보이는 담당의사의 태도는 시종일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건조하고 짧은 대꾸로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흡사 이런 일을 도맡아 냉정하게 대처하기 위해 태어난 위인 같았다.

그래서 자기는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할 의무만을 가진 의사라는 것만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심증만 굳어졌다.

욕지기가 식도를 타고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또 참아야 했다.오늘이라는 사회가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익명성의 비리는 밤마다 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환자를 기다리는 병원이라는 곳에서도 너무나 노골적으로 노출되고 있었다.

한철규는 결국 입원실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창문 너머로 얼핏 응급실에 누워 있는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침대 주위에는 보기에도 복잡하기 짝이 없고 어마어마한 의료장비들이 동원되어 있었다.

그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데는 충분한 가공스럽고 위협적인 장비들이었다.

심각한 얼굴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한 사람만 누워 있는 응급실을 쉴새없이 드나들면서, 환자를 면회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철규를 몹시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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