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하반신마비 中체조선수 재활의지에 격려 물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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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어젯밤 꿈을 꾸었어요. 꿈속의 제가 글쎄 걷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아름다웠는데…. "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을 휠체어에 묻은 채 나지막한 소리로 꿈을 이야기하는 한 아시아 소녀에게 앵글을 맞추던 CNN의 카메라 기자는 자꾸 흘러내리는 눈물로 몇번이고 초점을 고쳐 잡아야 했다.

괜스런 헛기침과 참다 못해 터뜨리는 흐느낌이 이곳저곳에서 이어졌다.

지난 1월 1일 0시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 직후 개최된 중국의 전 여자체조 대표선수 쌍란 (桑蘭) 의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미국 방송사들과 중국관영 CCTV 등이 몰려든 이날 회견은 국가.인종.체제 등 모든 벽을 뛰어넘어 14억의 미국인과 중국인을 함께 울리고 말았다.

올해 17세. 티없이 맑은 눈과 미소. 중국 여자체조의 대들보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체조 여자뜀틀의 금메달 유망주이던 쌍란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은 지난해 7월 21일이었다.

굿윌 (Good Will) 대회에 중국대표로 참가한 쌍란은 뉴욕 체조경기장에서 연습중 공중회전돌기를 하다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10초 가량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발견한 쌍란의 첫마디는 "저를 옮겨주세요. 다른 선수들이 연습을 하지 못하잖아요" 였다.

미국 의료진은 할 말을 잃었다.

두려움에 떠는 대신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씨에 감동한 것이다.

쌍란은 가슴 이하의 하반신이 마비되고 손가락에도 감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몸으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됐다.

지난해 8월 7일 의료진은 "기적이 없는 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는 참담한 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쌍란은 의연했다.

"미국의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틀린 말입니다. 저는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겁니다. "

그녀는 지난해 12월 퇴원해 재미 중국교포가 제공한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머무르면서 통원치료로 재활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영어와 컴퓨터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겠다' 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다.

눈물겨운 노력이 매스컴을 타고 미.중 양국에 알려지면서 쌍란은 현역시절 뜀틀 위에서 활약할 때보다 오히려 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 부부가 빌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를 갖고 쌍란을 찾았다.

10대의 우상인 영화 '타이타닉' 의 남자 주인공 디카프리오는 쌍란이 자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그녀를 찾아와 위로했다.

'타이타닉' 의 주제가를 부른 셀린 디옹도 그녀를 방문, 병상 앞에서 주제가를 열창해 주었다.

홍콩의 인기배우 청룽 (成龍) , 중국부총리 첸치천 (錢其琛) 도 쌍란을 찾은 유명인사들. 말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된 영화 '슈퍼맨' 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가 쌍란을 찾아 "우리 꼭 다시 일어서자" 고 다짐한 일은 미국인의 가슴을 또한번 뭉클하게 만들었다.

"지금 저를 간호하는 엄마가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보살펴 드리기 위해서라도 꼭 일어날 겁니다. "

미국인들이 한 중국인을 위해 이처럼 울었던 적이 있었을까. 쌍란은 오는 6월 휠체어와 함께 중국으로 귀국한다.

베이징 = 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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