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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그런데, 한씨네 행중이 처음으로 찾아 왔던 남도 휴양지 부곡온천. 그들이 뜨내기 노점상으로 뭉친 지 일년 만에 이틀 동안의 휴식을 겨냥하고 모처럼 느긋한 기분으로 넉살좋은 여자의 얘기를 듣고 있었던 그 시간에 느닷없는 수신음이 들려왔다.

걸면 걸린다는 그 이동전화를 가졌던 사람은 태호였다.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수신음이 들린 것은 새벽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노래방이라도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을 무렵이었다. 노래방을 찾겠다는 엄두를 가진 것은 형식이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형식이가 가졌던 부푼 꿈은, 무대 뒤에서 먼지와 땀 범벅이 되어 엎어지고 자빠지고 뒹굴고 날뛰는 백댄서였었다. 그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태호조차도 성도 이름도 모르는 요사이 신세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형식은 거의 못부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백댄서를 꿈꾸었던 녀석의 소원을 노래방에서나마 풀어주자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그 이상한 내용의 전화는 워낙 감도가 낮아 태호는 전화를 가지고 바깥 길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십여분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시 술자리로 돌아온 태호는 마차마담에게 투정을 부렸다. 멀쩡하던 전화가 갑자기 감도가 떨어지는 까닭이 뭐냐고 투덜거린 것이었다.

마담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날 새거든 자세히 둘러 보세요. 앞산 능선에다 장대를 던지면 한쪽 끝이 뒷산 능선에 걸리는 첩첩산중이 부곡온천인 걸요. 빨래 널기는 안성맞춤인 산골이라니까요. " 마담이 이죽거리고 있는 사이에 태호는 철규를 밖으로 불러냈다.

주문진 대선배한테서 걸려온 전화예요. 그런데 눈치없이 왜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 무조건 새벽 일찍 출발해서 주문진으로 오랍니다.

왜? 우리에게 탁송시켜줄 어물구입이 여의치 않나 보군.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소. 다급한 목소리예요. 게다가 잔뜩 취해 있습디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주정이겠지. 주정이 아니에요. 보기에 딱했던지 나중에는 차마담이 전화를 낚아채더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간곡하게 얘길 합디다.

그 사람들 정신나간 사람들이네. 누굴 보고 오라가라 하는 게야? 나도 그렇게 말했지만, 장사고 뭐고 걷어치우고 무조건 일행 모두 와달라는 거예요. 창고에서 도난사고가 났나?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었더니 또 그건 아니라고 딱 잡아떼네요.

연세가 한두 살 먹은 양반도 아닌 늙은이가 그런 억하심정이 어딨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주문진까지가 거리는 얼마며 또 장사 일정도 빠듯한 터에 행중 모두에게 와달라는 건 주정부릴 때나 할 말이지 올곧은 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잖아. 두 번 세 번 형식이는 두고 오라고 오금을 박는 걸 보니까 주정이 아닙디다.

무슨 내막 때문인지 말하지도 않고? 차마담한테도 따져 봤지만 와보면 알거라고만 합디다. 씨발, 도대체 이 늙은이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거 아냐?

철규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딴청하고 술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처음 작정했던 대로 일행을 노래방으로 데리고 갔다. 듣던 대로 형식은 걸물이라할 만한 녀석이었다.

몇 잔의 소주를 마시고도 사뭇 풀죽어 있던 녀석이 노래방 마이크를 잡은 순간부터는 물살을 역류해서 오르는 숭어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노래방 구석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먼지들이 순식간에 떨치고 일어나 요동을 쳤고 창자까지 내쏟을 듯 걸판진 목소리로 왕창 노랫말을 토해 내었다.

상하반신을 바람에 날리는 미역타래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터져나오는 노랫말의 전달력은 또 그렇게 또렷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냥 내버려두면, 아침 인사 외에는 하루에 한두 마디 할까말까 했던 형식의 전혀 다른 모습에 놀란 그들은 다만 아연 실색이었다.

승희 혼자서만 손바닥이 멍이 들어라 하고 손뼉을 쳐가며 형식을 부추겼다.

그리고 이튿날 신 새벽, 그들은 형식을 남겨둔 채 주문진을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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