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영빈칼럼]우리는 치매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는 너무 잘 잊고 산다.

한강 다리와 백화점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수백명이 참사하는 날벼락을 당하고도 쉽게 잊어버린다.

사건 당시에는 반짝 이를 교훈삼아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철통같은 약속을 하지만, 한 달 한 해가 지나면 너나 없이 모두 잊어버린다.

모두가 망각을 위해 기억을 포기한듯 살고 있다.

똑같은 잘못을 거듭 되풀이한다.

어제의 날치기 국회가 오늘에도 성행하고 어제의 정치 사찰 논란이 오늘에도 재연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심각한 치매증세에 걸린 탓이 아닌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묵은 신문철을 뒤적여 보자. 1995년 2월 20일자 중앙일보 1면 머릿기사는 이렇게 돼 있다.

'안기부 6월선거 연기 검토 문건 작성. 임시국회 파란 예고' .내용인즉 이렇다.

4년전 그 해는 6월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합의한 대로 선거를 실시할 것이냐, 아니면 기초단체장 선거는 미루고 광역단체장 선거만 먼저 실시할 것이냐로 긴장감이 돌던 때였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서 안기부가 전국 지부장에게 '단체장 선거 연기문제 검토' 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 문건이 뒤늦게 야당의원 손에 들어가면서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야당은 즉각 정권퇴진운동 불사 (不辭) 의 전열을 가다듬었고 여당은 행정개편공론화를 위한 내부 참고용일 뿐이라고 발뺌했다.

"여당이 계속 이런 음모를 추진할 경우 국민과 함께 반대투쟁에 나설 것이다. 대통령의 즉각 해명을 촉구한다" - 야당 대변인의 말.

"대북정책을 포함한 국가 중요정책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해 여론을 수집.분석하는 것은 안기부의 통상적인 업무일 뿐이다" - 안기부 측의 해명.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개혁입법으로 도입한 게 안기부의 정치관여 금지조항이었다.

안기부의 부.차장 및 기타 직원은 그 직위를 이용해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정치인에 대해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의견을 유포하거나, 이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 또는 정치인에 대해 찬양 또는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안기부법 제9조 2항) . 이 법에 따르면 안기부의 단체장 선거 연기에 대한 여론조사는 정치관여냐, 아니냐로 충분히 논의할만한 사항이었다.

여론조사 자체가 특정정당의 연기론을 유포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는 야당 판단이나, 단순 여론조사가 무슨 죄가 되느냐는 안기부쪽 입장이 팽팽히 맞설만 했다.

그러나 결말은 사건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김덕 (金悳) 통일원 부총리를 전격 해임함으로써 이틀만에 일단락됐다.

그 후 4년이 흐른 지금, 안기부 광주지부가 국회 529호실 사건과 관련해 야당의 불법 난입을 비난하는 내용의 홍보계획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기밀 불법탈취사건 대응계획' 이라는 이름의 이 문건은 야당의 강제진입을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지부의 역량을 쏟아 신문독자투고.항의전화 등을 통한 구체적 대민홍보 강화를 지시하고 있다.

야당은 즉각 정치공작 사과와 안기부장 해임을 요구했고 안기부 측은 본부 지시없이 독자적으로 지부 직원들의 충성심 경쟁에서 나온 것이라고 발뺌했다.

대응전략이나 대응논리가 4년전과 너무 비슷하다.

달라졌다면 언론이 전과 달리 비교적 조용하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또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때의 야당이 오늘의 여당이고 그 때의 여당이 오늘의 야당이라는 입장 차이다. 문건 내용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4년전 문건은 결과적으로는 특정 정당의 편을 드는 여론조사가 될지는 몰라도 명시적으로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여론수집용이라고 할만하다.

이에 비해 지금의 문건은 명시적으로 한쪽 편을 들고 있다.

야당의 불법성을 홍보하라는 계획을 담고 있다.

실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전화부대나 조직적 독자투고 등을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라는 구체적 실행계획까지 세웠다는 점이 4년전과 크게 다르다.

나는 평소 국가보안법 폐지는 아직까지는 시기상조고 국가경영전략을 포괄적으로 세우기 위해선 안기부의 순수한 정치관련 정보수집도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안기부 광주지부의 대응계획은 정치사찰 여부를 따지는 수준을 뛰어넘는 명백한 정치관여고 어제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습의 낡은 정치관행이라고 본다.

분명한 사과와 아울러 깨끗한 뒷마무리 책임규명이 있어야 새 시대 새 정치를 모색하는 탈 (脫)치매적 정치문화를 일굴 수 있다.

권영빈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