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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냐등 심술에 장기예보 폐지론까지 나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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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울 신대방동의 기상청 청사 2층. 이 곳의 장기예보반 근무자들은 요즘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다. 올 겨울은 맹추위가 위세를 떨칠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은 게 지난 해 11월 말. 그러나 1월 초순이 다가도록 오히려 예년보다 섭씨 1~2도 안팎이나 따뜻했다.

지난주 중반부터 혹한이 엄습했지만 이미 겨울 평균기온이 예년 이하이기는 힘들게 됐다. 여기 저기서 기상청에 항의성 전화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 동장군의 내습에 대비 겨울용품을 넉넉히 생산한 업체들은 물론 김장김치를 50포기나 담았다는 주부까지 계층도 다양하다.

특히 올해는 눈까지 없다시피 하니 겨울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들로부터도 원망을 사고 있다. 기상청의 지난 여름 예보 역시 실제와는 정반대였다.

지난 해 5월말 "올 여름은 엘니뇨의 영향으로 무덥겠다" 는 기상청 전망은 여름을 온통 적시다시피한 홍수로 완전히 빗나간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상청의 '실력' 이 요즘들어 뚝 떨어져 예보가 빗나간 것은 아니라고 기상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서울대 대기과학과 이동규 (李東珪) 교수는 "요즘 지구 대기는 아주 심한 변동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어떤 규칙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러니 향후 한 계절동안 날씨 예보가 제대로 되기 어렵다" 고 말한다.

李교수는 보통 5일 이내, 잘해야 2주 정도 날씨를 내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예측은 힘든 게 요즘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수년 새 이런 비규칙성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

공주대 김맹기 (金盟基) 교수는 "올해 지구 기온이 금세기 들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구온난화로 아예 온도나 강수량의 변동폭과 주기가 해마다 계속 변하고 있으니 과거의 기준이 앞날의 날씨를 예측하는 기준으로써 가치가 적을 수 밖에 없다" 고 말했다.

실제 이같은 기준이 흔들리는 탓인지 최근 10년간 겨울날씨는 엘니뇨.라니냐와 전혀 관계없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예보전문가들이 곤혹스러운 것은 미국.유럽 등도 마찬가지. 중서부 일대에 20년만의 혹한과 폭설이 엄습하는가 하면 프랑스는 20도를 넘는 이상 난동의 겨울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미처 이런 날씨를 짐작하지 못한 미국 기상청의 한 전문가는 "1주일 이후의 날씨를 예보하는 일이 불가능한 실정" 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예보가 이렇듯 제대로 들어맞지 않다보니 인명사상은 물론 경제적인 피해 또한 막심한 실정. 백화점들의 경우 가스스토브 등 난방용품 매출액이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이전의 절반수준.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11~12월 8억원어치도 못팔았다.무주리조트.보광피닉스 등 유명스키장들도 얼마전까지만해도 눈이없어 슬로프를 겨우 반 정도 가동하는데 그쳤다.

의류업체들도 마찬가지. 겨울용품 업계 관계자들은 "추운 겨울에 대비해 물건을 준비했다가 이상난동으로 본 피해가 최소 수천억원대에 이르지 않겠느냐" 고 추산한다.

계절예보가 연달아 빗나가자 일각에서는 장기예보를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실정. 서울대 李교수는 "요즘처럼 지구 전체의 열 수지 등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혀 일리가 없지 않은 발상" 이라면서도 "그러나 폐지에 따른 부작용도 고려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이런 견해에 대해 "장기예보는 역학모델에 의존하는데 엘니뇨나 라니냐 혹은 지구온난화 같은 변화를 이 모델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사실" 이라며 "경우에 따라 온도가 낮아질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있는 등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하는 식으로 예보기법을 달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고 밝혔다.

보름 후 날씨라면 예보자 스스로도 예측이 미덥지 않게 된 것이 라니냐와 엘니뇨가 주름잡는 요즘 지구촌 날씨가 보여주는 새 면모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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