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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아프간 여성 탄압에 눈감은 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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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연합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개시하는 이유 중 하나로 여성 해방을 꼽았었다.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탈레반 세력이 여성 탄압으로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일부 상황이 개선되긴 했다. 의회에 여성 의원들이 등장했고, 수백만 명의 여학생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전반적인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다. 전체 여학생 중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은 4%에 불과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공직 진출 여성은 일상적으로 위협을 받고, 일부는 살해된다.

이런 상황은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최근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시아파 개인지위법’을 발효시키면서 더욱 악화됐다. 소수 이슬람 원리주의 종파인 시아파에 적용되는 이 법은 여성 인권 침해 조항을 여럿 담고 있다. 자녀에 대한 권리는 전적으로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부여했다. 결혼한 여성은 ‘합리적인 법적 근거’가 있을 때만 남편의 동의 없이 집을 나올 수 있도록 해 현실적으로 이혼을 힘들게 만들었다. 또한 이 법은 어린이나 정신장애 여성을 강간한 남성에 대해 형사 처벌 없이 금전적 보상만 하도록 규정했다.

카르자이는 지난달 27일 이 법을 공표조차 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발효시켰다. 지난 4월 그가 이 법의 초안에 서명한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외에서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지도자들은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야프 더호프 스헤퍼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은 “나토 회원국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나라를 위해 싸우라고 군대를 보낸 것이 아니다”며 철군 가능성을 경고했다. 카르자이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이 법의 개정을 약속했고, 일부 개선하기도 했다. 여성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흘에 한 번은 반드시 남편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을 억압하는 조항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법이 발효됨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서 공권력에 의한 여성 차별과 억압을 과거사로 돌리려던 희망은 무산됐다.

최근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카르자이는 시아파뿐 아니라 전임 군벌 지도자와 군 지휘관들을 내각에 앉히겠다는 속내를 드러냈었다. 이들은 대개 탈레반만큼이나 여성 인권을 탄압한다. 더욱 걱정스러운 건 카르자이가 탈레반과 이슬람 근본주의 정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로 보이기 위해 여성 인권을 유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간 어렵게 얻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지만 서방은 아직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권 운동가는 “탈레반과의 협상은 지난 8년간 우리가 성취했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여성 인권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탈레반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 인권에 대한 무관심에선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수년 전 탈레반의 여성 학대에 깊은 혐오감을 표현했었다. 그런 그들이 침묵만 지키며 ‘시아파 개인지위법’의 폐지를 요구하지 않는 건 모순 그 자체다.

레이철 리드 휴먼 라이츠 워치 연구원
정리=정재홍 기자, [워싱턴 포스트=본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