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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경제위기' 깨닫나…'개혁'서 '민생'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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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부산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던 열린우리당 윤원호 의원(초선)은 요즘 '시장주의자'로 변했다. "기업인들의 불만이 하도 높아서"란다. 그는 "'이대로 살겠느냐'는 소리가 높아 지역에도 못 간다.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의원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런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움츠리게 했던 것은 내부 분위기였다. "다른 건 다 놔두고 경제부터 챙기자고 하고 싶어도'보수 꼴통'이란 소리를 들을까봐 못했다"(초선 B의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8월부터 달라졌다. 당 지도부부터 바뀐 모습이다. 지도부는 이제 정책의 무게중심을 '개혁'에서 '민생과 경제'쪽으로 옮기고 있다. '개혁 탈레반(원리주의자)'으로 불리던 신기남 당의장은 최근 수차례나 민생을 강조했다. 그가 10일 오전 서울 청량리의 '밥퍼운동본부'를 찾아 노숙자들을 위해 주걱을 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취임 초만 해도 "개혁은 힘이 있을 때 해야 하고, 안정을 외치며 세월을 허비해선 안 된다"고 했던 그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개혁'이라는 것을 기치로 내세워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했다. 그런 그도 이젠 경제 살리기 행보에 열중하고 있다. 무역협회.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경제단체들과의 면담 일정을 줄줄이 잡아놓고 있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민생 안정을 구실로 개혁을 뒤로 밀어넣어선 안 된다"(천 원내대표)면서 정부와 청와대가 반대하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등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요즘은 이런 논의 자체가 당내에서 사라진 형국이다.

당 지도부의 인식변화는 노선에 대한 반성이나 다름없다. 김부겸 의장 비서실장은 "경제를 못 살리면 개혁도 불가능하다는 게 지도부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당의 핵심관계자는 "당이 시장친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면서 합리적 보수층이 한나라당으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개폐, 과거사 규명, 언론개혁 등 당이 추진한 이른바 '개혁조치'도 "경제가 어려운데도 여당의 눈은 다른 데로 가 있다"는 비판여론을 일으켜 노선전환을 촉진한 측면이 있다.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 조사 여부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반대(52%)가 찬성(41%)보다 높았던 것도 당 지도부가 감안했다고 한다.

민생이나 실용을 언급하면'개혁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던 당내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민생파''실용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민생을 강조해온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은 최근'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 포럼'을 결성했다. 여기엔 소속 의원 30여명이 참여했다. 청와대 출신의 이광재 의원 등 20명에 가까운 의원들이 만든 '신(新)의정연구센터'도 중소기업인들의 현장 애로를 청취하는 등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산자부 장관 출신의 정덕구 의원도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을 가동 중이다. 17대 총선 직후에는 전문관료 출신 의원들이 당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성토의 대상이 되곤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개혁파 일부 의원들에게 "과연 여당의원다운 책임감이 있느냐"는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신용호.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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