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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로 마지막 길 장식 … 추모엔 이념·지역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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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3일 국회의사당 내 잔디광장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장면. 전직 대통령으론 처음 치러진 국장 영결식엔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5부 요인, 김영삼·전두환 전 대통령, 외국의 조문사절 등 2만40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신 운구차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23일 오후 1시55분 국회의사당 잔디광장. 영결식 사회를 맡은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의 말에 2만4000여 조문객의 눈이 일시에 중앙제단 좌측으로 쏠렸다. 1992년 대선 패배 직후 6선 의원직을 반납, 국회를 떠났던 김 전 대통령이 하얀색 국화 화환으로 치장된 운구차에 실려 17년 만에 마지막으로 ‘등원’한 순간이었다. 영정과 그가 생전에 받았던 무궁화대훈장·노벨평화상 메달이 운구차를 선도했다. 이희호 여사는 며느리들의 부축을 받으며,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식장에 들어왔다.

이어 장의위원장 한승수 총리의 조사가 낭독됐다. 한 총리는 “고인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한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며 “대통령께서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국민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추도했다.

추도사는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이 했다. 박 이사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우리의 선생님!”이라며 운을 뗀 뒤 “김대중이란 이름은 불멸할 것이니 이제 역사 속에서 쉬십시오”라고 목 멘 소리로 말하자 이희호 여사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박 이사장은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고인의 마지막 말씀을 새기겠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당신이 곁에 계실 것을 믿는다”고 했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박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 내외와 각별한 사이다. 87년 김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을 땐 부총재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고 이듬해 여성으론 처음 비례대표 1번을 배정받아 13대 국회에 입성했다. 박 이사장이 추도사를 낭독한 건 김 전 대통령이 생전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앞장서온 점이 고려됐다는 설명이다.

이어 최창무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을 필두로 조계사 주지 세민 스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삼환 회장, 원불교 김혜봉 대전·충남교구장이 각각 집전한 종교의식이 20분간 진행됐다.

의식이 끝나자 제단 옆 대형 전광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이 5분간 상영됐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과 더불어 위대한 한국인의 시대를 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는 김 전 대통령의 육성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이어 이 여사가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헌화와 분향을 했다. 영정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던 이 여사는 홍일·홍업·홍걸씨 등 아들들의 헌화가 끝나자 고개 숙여 남편에게 인사하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헌화했다. 이때 한 50대 남성이 “위선자”라 소리쳐 경호원들이 제지하기도 했다. 손 전 장관은 “(장례를) 엄숙히 치르도록 자리를 정리해 달라”고 호소했다.

오후 3시29분. 성악가 김영미씨와 평화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추모곡 ‘그대 있음에’ ‘우리의 소원’을 부른 뒤 21발의 조총 발사로 1시간10분여 만에 영결식이 마무리됐다.

이어 행렬은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잠시 멈췄다. 이희호 여사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당직자들은 “이 여사님, 힘내세요”라며 위로했다.

운구차는 여의도 민주당사를 거쳐 김 전 대통령의 오랜 거처였던 동교동 자택 앞에 멈췄다. 야당 시절 정권의 감시와 미행, 55차례의 가택연금 속에서 그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던 곳이다. 손자 종대씨가 든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은 지난달 13일 입원 직전까지 집필과 독서열을 불태운 서재, 투석 치료를 받던 간이침대, 이 여사와 마지막 나날을 보낸 침실과 거실을 둘러봤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추억이 서린 정원에 앉아 한없이 울었다. 종대씨는 영정을 고인이 평소 즐겨 앉았던 1층 거실의 소파에 잠시 내려놨다.

잠시후 2층 침실로 가 할아버지인 김 전 대통령이 앉던 의자에 영정을 내려 놓은 종대씨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정이 집 옆의 김대중도서관으로 이동하자 상복 차림의 직원 10여 명이 흐느끼며 맞았다. 영정은 고인의 업적이 총망라된 1층 전시실과 2층 자료실, 5층 집무실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야당 시절 그를 수십 년간 감시했고 대통령 퇴임 후엔 경호를 맡으며 인연을 맺어온 마포서 경찰관들이 거수경례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숙선 명창이 추도창을 부르며 고인의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추도창은 이 여사가 입관식 때 관에 넣었던 마지막 편지를 가사로 한 것이다.

◆“DJ의 상징은 인동초”=영결식 꽃 장식은 흰 국화와 함께 전남 구례에서 공수해온 100대가량의 인동초로도 꾸며졌다. 꽃 장식을 맡은 ㈜용담화원 김은혜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게 인동초인데, 이는 늦은 봄까지만 피는 꽃이어서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며 “구례에 아직 꽃이 남아있는 나무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급히 구했다”고 전했다.

◆영결식 시청률 29%=방송 3사가 생중계한 영결식 시청률(서울 기준)은 29%를 기록했다고 AGB 닐슨미디어리서치가 집계했다. 지난 4주간 동 시간대 평균 시청률 17.4%보다 12%포인트 높은 수치다.

강찬호·백일현·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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