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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육상 이대론 안 된다 <1> 핑계거리부터 찾는 선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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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정준이 19일(한국시간)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100m 허들 예선에서 허들을 넘고 있다. 이정준은 이날 예선 1조에서 자신의 한국기록(13초53)보다 0.3초 뒤진 13초83을 기록, 조 6위로 예선 탈락했다. [베를린 AP=연합뉴스]

베를린에서 희망을 찾으려던 한국 육상이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23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폐막된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한국은 9개 종목에 걸쳐 19명의 남녀 선수를 출전시켰지만 전원이 예선 탈락하거나, 예선이 없는 종목은 최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남자 세단뛰기와 경보, 마라톤 등 일부 ‘틈새 종목’에서 상위권 진출을 노렸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2년 앞으로 다가온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한국 육상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한국 육상의 문제점과 대책을 3회에 걸쳐 진단한다.

“아팠어요. 지원이 부족했어요.”

23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선수들은 한결같이 부상과 지원 부족을 부진 이유로 꼽았다. 패배가 당연하다는 듯 다부지게 반성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2년 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둔 한국 육상의 시급한 과제는 선수들의 기량 향상 못지않게 정신자세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나약하고 이기적인 선수들로는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훈련 못 하고 대회에 나왔다

김덕현이 남자 세단뛰기 예선에서 도약하고 있다. [베를린=연합뉴스]

남자 세단뛰기 예선에서 탈락한 김덕현(24·광주광역시청)의 인터뷰는 실망스러웠다. “무릎과 사타구니가 아파 거의 훈련을 하지 못했다. 위에서 뛰라고 해서 억지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를 아는 육상인들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멀리뛰기 예선을 마치고는 한술 더 떠 “외국인 코치와 호흡이 맞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남자 110m 허들에서 예선 탈락한 이정준(25·안양시청)은 육상연맹의 지원 부족을 거론했다. 그는 육상연맹이 총력 지원하는 ‘2011년 대구대회 드림팀’ 핵심 선수다. 이정준은 “미국 전지 훈련 때 연맹에 차량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훈련이 제대로 될 수 있겠나”라고 태연히 말했다. 연맹의 한 관계자는 “직접 차를 몰면 사고 위험이 있으니 경비를 줄 테니 택시를 이용하라고 한 것뿐인데…”라며 씁쓸해했다. 이정준은 또 1년 전부터 자신을 지원할 전담팀을 요청했지만 감감무소식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에 대해 연맹 측은 “한 사람만을 위한 전담팀은 형평에 문제가 있다. 이번 미국 전지훈련 때는 유능한 코치까지 따로 붙여 줬는데 그런 말을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선수 태도를 나무랐다.

◆힘든 훈련은 ‘노 생큐’

이번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던 한 육상 관계자는 “저놈 또 가을 생각하는구먼”이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국 육상은 언젠가부터 세계대회에서는 대충 뛰고, 가을에 벌어질 전국체전에 주력하려는 악습이 존재한다. 상위권 진출 가능성도 작고 특별한 인센티브가 없는 세계선수권보다 포상금이 걸려 있는 전국체전이 구미에 당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육상 관계자는 전국체전 육상종목의 점수 배점을 순위가 아닌 기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개선은 요원하다. 시·도 간, 종목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조정이 쉽지 않다.

편안함을 좇는 현실도 안타깝다. 한 실업팀 관계자는 “조금만 훈련 강도를 높여도 ‘힘들어 못하겠다. 시·군·구청팀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난감할 따름”이라고 하소연했다. 요즘 선수들은 실업팀에서 힘들게 훈련하기보다는 훈련도 느슨하고 신분이 보장된 시·군·구청 팀을 선호한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기록은 뒷전이고 고되게 훈련시키는 지도자는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신력 강한 유망주 길러야

한국 육상의 기대주들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커 왔다. 워낙 선수층이 엷다 보니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줬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자기중심적이고 투지가 없는 이유다. 육상 관계자들은 나약한 선수들을 과감하게 대표팀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육상인은 “2011년 대구 대회를 끝으로 한국 육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대구 대회에서 메달을 따내지 못한다고 해도 먼 미래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당장 기록이 좋은 선수들보다는 정신력이 투철하고 장래성 있는 유망주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침체된 한국 육상을 살리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상금만을 좇아 대회에 나서기보다는 국가대표의 사명감을 고취시킬 교육 프로그램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육상 감독은 “일본 대표팀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단 한 푼의 포상금도 내걸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선수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며 “정신력이 강했던 한국이 이제는 오히려 일본을 배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베를린=최원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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