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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과거는 과거로 돌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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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000년대의 마지막 한해를 맞는다.

격동의 한 천년대가 끝으로 지나는 해다.

우리 역사상 20세기만큼 충격의 세기도 없다.

시련에 시련이 이어지고 격변에 격변이 중첩됐다.

이제 우리는 새 1백년, 새 1천년을 준비하면서 우리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 금융을 맞은 이후 자나깨나 경제이야기만 해 왔다.

경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먹고 살고 번영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긴요한 일이지만, 또 그토록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불과 한 세대내 1인당 국민총생산 (GNP) 80달러에서 1만달러 수준에 도달한 저력을 갖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가진 국민이다.

그 국민이 불과 2백억달러의 구제금융을 갖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다.

오매 (寤寐) 간에 "경제, 경제" 하고 매달릴 만큼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시킬 필요도 없다.

외국인이 흔히 말하는 대로 우리 제조업은 여전히 튼튼하고 물적 토대는 어느 나라 못지않게 단단하다.

IMF사태를 놓고 6.25 이후 최대 위기니, 딜레마니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다.

거짓말 잘 하는 정치인들이 그들 식의 정치논리로 떠들어 댄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지나치게 말하면 혹세무민이고, 좀 더 엄정하게 말하면 권력쟁투의 레토릭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해도 벌써 우리 경제의 거시지표가 좋은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치솟던 금리도 하락하고 환율도 안정되고 경상수지도, 외국인투자도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다.

6.25 이후 최대 위기라면 불과 1년이 안돼 어떻게 달라질 수 있겠는가.

이를 두고 정부 여당은 스스로의 공이라 자찬하는데 그 자찬을 수용 못할 만큼 인색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경제가 어떻든 나아지는 징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세기를 준비하고 다짐하는 우리의 과제도 다른데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보다 더 긴요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크게 관심을 쏟지 않고 있다.

설혹 쏟는다 해도 어제 그제나 마찬가지로 타성적으로만 쏟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내부의 '상호관계' 다.

지금 우리는 너무 분열돼 있다.

양극화라 할 만큼 이편이 저편을 공격하고 저편이 이편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지금처럼 내부분열이 적대적이라 할 만큼 우려되고 심화되는 때도 찾기 어렵다.

그 이유를 우리는 모두 정치인에게 돌린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지탄해도 치유능력이 없다.

그들은 불치병환자나 다름 없다.

문제는 그들을 뽑아준 우리 국민이다.

우리 국민의 생각이며 행동이다.

올 한해는 우리 국민의 그것을 고치는 시작의 해가 돼야 한다.

지금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근본주의자' 들이다.

서구식으로 말하면 펀더멘털리스트 (fundamentalist) 들이다.

종교적 의미가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의 근본주의자는 명분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고,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명분은 실용.실제가 아닌 표면 상의 이유다.

과거는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의 일이다.

우리는 이 표면 상의 이유와 지난날의 허물을 끊임없이 따지며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사고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못하게 한다.

그 대표적 예가 역사 바로 세우기며 청문회다.

과거는 과거의 논리가 있다.

그 과거를 현재의 논리로 아무리 캐도 그 허물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독일의 역사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경험과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 경험과 역사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도 얻어내지 못한다" 는 것이다.

현실적인 영국인들이 잘 쓰는 언어 중에 "과거는 과거로 돌려라 (Let bygones be bygones)" 라는 말이 있다.

과거를 갖고 떠드는 국민치고 정치인 제대로 선출해내는 국민 드물고, 그 과거에서 현재의 교훈을 얻어내려는 국민치고 내부 분열 일으키지 않는 국민이 드물다.

과거를 캐물으면 물을수록 그것은 단지 분노의 표출일 뿐이다.

역사는 역사학자들이 말하듯이 '역사적 현재' 다.

현재 바로 하면 역사는 저절로 바로 선다.

과거 허물은 현재 법을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공정히 집행하면 저절로 찾아지고 고쳐진다.

50년대 세계 10대 부국의 하나이던 아르헨티나가 페로니즘 (Peronism) 이 등장하고 10년이 채 못돼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나라가 됐다.

이를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수수께끼' 라 부른다.

그 수수께끼의 주요인 또한 우리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득세다.

과거를 파헤치며 과거에 분노를 터뜨리는 사이 현재도 미래도 그 관리는 엉망이 돼버리는 것이다.

바로 다음 1천년을 준비하는 올 한해는 이 근본주의자들의 습성에 여전히 젖어 있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한해가 돼야 한다.

송복 연세대 정치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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