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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받는 일본 연예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8호 05면

요즘 일본 연예계의 가장 큰 화제는 가수 겸 배우 사카이 노리코(38)의 마약 사건이다. 그는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원조 아이돌 스타이자 ‘별의 금화’(고현정이 주연한 한국 드라마 ‘봄날’의 원작) 등 인기 드라마에 출연해 ‘일본의 미소’라는 별명을 얻은 국민 여배우. 깔끔한 이미지로 사랑받아 온 그가 서퍼(Surfer)인 남편과 함께 각성제를 열 차례 흡입했다는 뉴스에 팬들이 큰 충격에 휩싸였단다. 이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 일본 정부가 지난주 ‘마약 등 약물 오남용 방지를 위한 5개년 계획’을 급히 발표했을 정도다.

이영희 기자의 코소코소 일본문화

일본 포털사이트를 가득 메운 관련 뉴스를 보며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소속사 사장의 인터뷰였다. 10대 소녀였던 그를 발탁해 24년간 함께해 온 소속사 ‘선 뮤직’의 아이자와 사장은 사건 직후 방송에서 “만약 노리코가 기소된다면, 해고(解雇)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연예인’과 ‘해고’라니? 우리에겐 생소한 조합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건 일본 연예기획사의 독특한 시스템 때문. 한국 연예인들이 소속사와 일정 기간 ‘계약’을 맺는다면, 일본 연예인들은 소속사에 ‘입사(入社)’한다. 일본에는 아무로 나미에, ‘스피드’ 등이 소속된 ‘라이징 프로덕션’, ‘스마프(SMAP)’ ‘아라시’ 등을 키운 ‘자니스 프로덕션’, 유명 코미디언 대부분이 속해 있는 ‘요시모토 흥업’, 탤런트·영화배우 수백 명을 거느린 ‘호리 프로’ 등 대형 프로덕션 십여 개가 연예인 매니지먼트에서 콘서트 기획, 방송 제작까지 직접 참여하며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다.

신인들은 이 회사들 중 하나를 골라 입사한 후 연봉계약을 하고, 매월 일정 월급을 받는다. 그해 열심히 활동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면 연말에 그만큼의 ‘성과급’를 받고, 다음 계약에서 연봉이 올라가는 식이다.

한번 입사한 회사는 대부분의 연예인에게 ‘평생 직장’이다. 기획사들은 일종의 담합을 맺고, 다른 회사의 ‘연예인 사원’을 빼내 가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 돈 문제 등으로 연예인이 소속사와 갈등을 빚고 퇴사할 경우, 업계 전체의 ‘왕따’가 돼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진다고 한다. 이런 관례 때문에 한국에서는 ‘선진적’이라고 평가하는 일본의 연예산업 시스템이 사실상 연예인들을 더 옭아매는 ‘진정한 노예계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선 뮤직’ 사장의 ‘해고’ 발언이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 역시, 이것이 사실상 최고 인기 배우 사카이 노리코의 연예계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고용 시스템’은 서로 다른 ‘일자리 문화’를 만들어낸다. 매월 또박또박 입금되는 월급의 압박에 마냥 ‘땡땡이치기’가 쉽지 않은 회사원처럼, 일본 연예인들에게는 ‘공백기’라는 게 별로 없다. 일본의 최고 아이돌 가수이자 배우인 기무라 다쿠야는 이미 10여 년 전 소속사와 협의를 통해 월급제가 아닌 ‘건당 배분’ 형식으로 계약을 수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매년 한 편씩의 드라마 시리즈와 영화에 출연하며, 매주 버라이어티를 진행하고 2~3개월씩 걸리는 전국 라이브 투어까지 소화한다.

한번 작품을 찍고 나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3년씩 광고 외의 모든 활동을 쉬어버리는 한국의 톱스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본에 50~60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 같은 ‘평생 고용’ 시스템이 만들어낸 하나의 조직문화가 아닐까.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가요·만화 등을 담당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를 향한 팬심으로 일본 문화를 탐구 중이다. J 팝을 비롯해 일본 만화·애니·드라마·영화 등에 폭넓게 촉수를 뻗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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