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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無에 기댈 수 밖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오랜 인연이 있는 신도들은 나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유명한 교구본사의 주지.총무원장, 그리고 필경에는 종정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저 기대가 항상 부담스러웠다. 불도는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해주지만, 저 신도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위를 향해 매진해 나가라고 격려하려 든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쁘기만 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겪은 조계사의 폭력사태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부끄럽기 이를데 없는 참사였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생생하게 보여준 화염병.유리조각.각목.화재.난투극이 오히려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총무원장이나 종정이 되는 길목에는 얼마나 추한 싸움이 있어야 하는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신도들은 나에게 더 이상 명예와 권력을 얻으라고 채근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탐내는 권력을 얻는데 우리가 본 만큼의 폭력이 기여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나는 저 유형의 폭력이 무형의 암투에 비해 1백분의1도 못된다고 과장해 말하고 싶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음모와 술수가 더 무섭다고 말하고 싶다. 높은 분이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 나오는 비사 (비史) 를 들어보면, 권력을 잡기 위해 군대.검찰.국세청.정보기관, 심지어 북한까지도 교묘하게 이용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이기는 사람만 머리.주먹.무기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쓸 수가 있다. 최소한 자신이 이기지 못하더라도 남이 지도록 방해를 할 수는 있다. 한 여자도 대통령직을 위태롭게 할 수 있고, 한 사병도 국방장관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 한 용접공도 대형건물이 무너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성취도 남의 도움에 의해 얻어지고 지켜진다. 실수든 고의든 사고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어야 일이 제대로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바람.구름.산천초목까지도 나쁜 마음을 먹고 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어떤 자리든 지켜질 수 있다.

여기에 진급을 원하는 사람이 열명이 있는데 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치자. 아홉명은 탈락할 수밖에 없다. 한명은 이름을 날리고 아홉명은 지워져 버린다. 아홉명이 탈락한 이유는 무능력일 수도 있고 줄을 대지 못한 무인연 (無因緣) 일 수도 있다. 여하튼 무 (無)가 된다.

그런데 한명의 진급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겠지만, 반대로 다른 이의 무능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유능은 상대적으로 다른 이의 무능에 의해 인정받게 된다. 다른 이가 무로 사라져주기 때문에 유능자가 남을 수 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항상 (恒常)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세상의 무상 (無常) 도 우리에게 덕을 베푼다. 만약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살아있다면 우리의 경쟁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선배들이 늙지 않고 항상 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월이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들을 남김없이 쓰러뜨려 주기 때문에 새 사람이 얼굴을 내밀 수가 있다.

무 덕분에 오늘의 출세자가 있을 수 있다. 진급하고 출세하는 이만 무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니다. 종정.총무원장.대통령.장관 등이 되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우리도 저 무를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밀물이 모래사장을 깨끗이 쓸어주듯이 무상법이 모든 싸움과 승리의 덧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무로 되돌아가기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싸움질에 출연해 승리한 이도 결국 무로 돌아간다면 어쩌란 말인가. 무엇에 의지하란 말인가. 열반경은 의지해야 할 것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각기 네가지씩 들고 있다.

첫째, 불도를 닦을 때 무의 진리를 의지할지언정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특정한 사람을 맹종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법문을 듣더라도 무의 속뜻을 살피고 이름과 형상에 끄달리지 않아야 한다.

셋째, 내면으로부터 터득한 무의 지혜에 의지하고 밖으로부터 빌린 지식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넷째, 무의 참뜻을 가르치는 경전을 중히 여기고 세속적 성취를 가르치는 경전을 잘못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역시 무다. 무에 의지해서만 세상의 모든 싸움을 소화하고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석지명 처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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