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허상이 만든 미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미국은 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WMD)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있는 것으로 믿고 이라크를 공격했을까. 미 상원 정보위는 몇주 전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미국 여러 정보기관의 착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해 국방부 산하 여러 정보기관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착각할 수 있을까. 상원 정보위 보고서는 '집단적 사고(Group Thinking)'문화가 그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심정적으로 이라크가 분명히 WMD를 갖고 있거나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활동했다. 바로 이 믿음이 문제였다. 모호한 증거가 나와도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것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그만 사실이 발견되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이를 묵살하고 넘어갔다. 잘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타 기관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평가를 인용했다. 그 결과 실제론 없는데도 모든 정보기관이 WMD가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 집단적 사고에 빠진 우리사회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자기의 확신을 점검하고 그를 통해 더욱 믿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점점 없어진다. 우리 사회가 시간이 갈수록 분열이 치유되지 않고 점점 더 고착화돼 가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우리 분열의 핵심은 북한문제다. 한쪽은 다른 쪽을 보고 친북세력이라고 한다. 다른 쪽은 그쪽을 보고 북한을 핑계삼아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계속 옹호하려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정말 사실은 어떨까.

사실에 관심이 있으려면 상대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얘기해 보고 정말 그런지 알아봐야 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만 매일 만나 얘기해 봐야 그런 사실을 발견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기존에 가졌던 자신의 신념만 강화시켜 갈 뿐이다. 우리는 나라 전체가 집단적 사고에 빠진 것은 아닐까.

집단적 사고를 더 강화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허상이다. 허상은 개인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 은밀하게, 또는 확대하여 주입하는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허상이 만연해 있다. 한쪽은 기업인을, 부자를 비난한다. 부자나 기업주는 배가 불룩 나오고,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고, 입에는 거만하게 파이프 담배를 문 그런 인물들이라는 허상을 갖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부자들이 그런 사람들일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을 살리려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못 자 얼굴이 꺼칠해진 사장들, 자신의 재산을 책임있고 명예롭게 사용하려는 건실하고 따뜻한 부자들,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오히려 더 많을 수 있다.

반대로 근로자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노동자라 하면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르면서 돈만 많이 요구하고, 틈만 나면 술이나 마시고 노름이나 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허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7000만원 가까운 연봉에 골프연습장과 수영장이 딸린 사택에 살면서 돈을 더 내놓으라고 파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근로자의 전부는 아니다. 성실히 땀흘려 일하며, 미래를 위해 적은 봉급을 저축하며, 알뜰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근로자가 더 많을 것이다. 상대의 실체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서로 극단의 허상을 만들어 미워하며 싸우는 것은 아닐까. 누가 우리 마음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 나쁜 이미지 덧씌우기 끝내야

나라의 분열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제를 살리자고 외쳐 보아도 힘이 나지 않는다. 양쪽이 자기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너머로 소리만 지르니 마음이 모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의식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상대의 허상이 아니라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촛불을 들고 나서는 쪽과 반김.반핵 데모에 나서는 쪽도 서로 만나볼 필요가 있다. 상대에게 씌워진 허상만이라도 서로 벗겨줄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적어도 서로 미워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때부터 대화가 가능하며, 해결의 길을 함께 찾아 나설 수 있다.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다는 믿음 때문이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