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부마가 조막 방에 기거한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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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연암집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평소 방 하나에 기거하면서 자기 앉을 자리 말고는 다른 자리를 만들지 않고 ‘방이란 제 무릎을 들일 만하면 족하다’ 하였지요. 등 뒤에는 민병풍 하나, 눈앞에 묵은 벼루 하나, 창 아래는 책 두어 질, 베개맡엔 술 반 병으로, 그 속에서 나날을 보내니 고요하고 한적하기가 규방과 같습디다.”

박지원이 팔촌형 박명원을 가리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옮겨 적은 것인데 열네 살 때 왕의 부마가 돼 세 차례나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온 권력자가 거주하는 방이 그랬다. 그라고 좁디 좁은 방이 무에 그리 좋았을까. 그건 청탁을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처럼 자신의 좌석만 남기고 손님을 맞을 좌석을 두지 않는 것을 ‘측석(側席)’이라고 했다. 물리치기 힘든 청탁을 원천 봉쇄하는 옛사람의 지혜가 그랬다.

측석의 예는 많다. 조선 인조 때의 재상 이원익도 그랬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임금이 승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는데 승지가 돌아와 임금에게 한 보고가 이렇다.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 정도인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 세종 때 우의정 유관은 장마철 비 새는 좁은 방에서 우산을 쓰고 앉아 바가지 긁는 부인을 달랬다.

이런 지지리 궁상을 그들이라고 어찌 반겼겠나. 나라에서 주는 녹만 가지고도 그리 남루한 형편은 면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런 삶을 택한 건 권력과 재력이 한 손에 모이면 안 된다는 공직 철학 때문이었다. 권력자 주변에는 엽관과 이권을 좇는 모리배들이 파리떼처럼 들끓는 게 세상 이치다. 애당초 재물에 관심이 없다는 걸 내놓고 드러내 그들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고자 한 선비 정신이었던 것이다. 성호 이익의 금언이 바로 그런 의미다. “선비가 힘쓸 것은 여섯 가지 참는 데 있다. 주림을 참아야 하고 추위를 참아야 하며 수고로움을 참아야 하고 곤궁함을 참아야 하며 노여움을 참아야 하고 부러움을 참아야 한다. 참아서 그것을 편안히 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옛 선비들의 이런 ‘까칠함’을 오늘날 공직자들에게 요구하는 건 무리다. 사실 옛날에도 그런 선비들은 흔치 않았고 오히려 “제 집 새는 비도 못 막는 주변머리로 무슨 나랏일을 돌보나” 조롱도 받았을 터다. 그런 주변머리 정신이 선비 정신을 대체하는 과정이 근대화요 현대화였다. 오늘날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그 사람의 성공은 물론 품격까지 평가되는 상황에서 공직자들한테만 희생을 강요할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땅에 연년세세 측석을 실천하는 선비 정신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손에 쥐어진 권한을 재물로 바꿀 주변머리 없는 공직자들이 곳곳에서 맡은 소임을 묵묵히 다해 왔다는 것이다. 신문에 나는 일들로만 봐서는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이 나라가 그래도 굴러 가는 것이 다 그들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서운함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다. 저 옳다고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그저 할 일만 하고 할 말만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는 퇴근길 소주 한잔에 넘겨 버릴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목소리 큰 사람들이 부정한 짓으로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새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도 끝나고 청와대와 내각 개편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적어 보는 잡설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