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일본 역사의 덫 풀어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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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사 문제를 둘러싼 외교는 외줄타기 묘기나 다름없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이나, 중국에서의 반응이 예민할수록 일본은 더욱 굳어지고 운신의 폭이 좁아져 마찰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 특유의 이 역사 알레르기 현상은 26일 중.일 정상들이 양국간 우호협력을 다짐하기 위한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보류함으로써 다시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과거 역사에 대한 '사죄' 를 공동선언문에 넣느냐 구두로 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두 나라 정상간 신경전은 한때 도쿄 (東京) 외교가를 긴장시켰다.

세계 강대국으로 불리는 중.일간 역사 문제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면 한국에 부담이 되고 아시아 각국이 중.일 사이에서 갖는 대화도 시원치 못할 것이다.

중국은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지난달 김대중 (金大中) 한국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서 과거 불행한 역사에 대해 '사죄' 한다는 어휘를 넣어 어느 정도 한국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수준의 조치를 원했으나 거부당했다.

오부치 총리는 중.일 공동선언문에 '사죄' 를 넣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지 예측하고 있다.

이미 자민당내 우파의 반발이 거세졌고 현재 그의 통치 스타일에 불만을 가진 파벌들이 여차하면 정권을 뒤흔들지 모를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26년 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역사 문제처리에 대해 양보할 만큼 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한국모델' 이다.

일본은 한국이 전후 일본의 세계평화 공헌을 평가한 만큼 중국도 긍정적인 측면의 변화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과거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과 경제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대중문화 개방과 '천황' 호칭 및 천황의 방한을 추진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감도는 놀라울 만큼 높아졌다.

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은 내년부터 2년동안 중국에 약 4천억엔에 이르는 정부개발원조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어떤 형태의 선물도 받지 못했다고 서운해하고 있다.

일본은 늘 부담이 됐던 역사의 덫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외교를 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모델' 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미국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모델' 을 역시 높이 평가하면서 아시아의 반미 성향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한국모델' 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과 그 무게에 따라 달리 평가를 받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높은 차원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특히 한.일 역사마찰을 극복하는 여러가지 모델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보다 성숙한 자세와 행동이 필요하다.

오늘부터 일본 가고시마 (鹿兒島)에서 열리는 한.일 각료회담에 참석하는 김종필 (金鍾泌) 총리와 5명의 각료들은 태평양전쟁때 일본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 전 외상의 기념관을 지나가게 된다.

임진왜란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의 후손인 그는 A급 전범으로 잡혀 옥중에서 자살했다.

우리 대표단의 가슴속에는 만감이 교차될 것이다.

金총리는 또 일본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본어 강연을 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얼마만큼 열린 마음으로 일본에 다가갈 것인지는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다.

최철주(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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