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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반항의 매혹, 매혹의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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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도 아는 ‘워터’ 따위는 요즘 영어 축에도 못 낀다. 그러나 우리 때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이 말을 배웠다. 이런 판에 근사한 대학생 누나가 와서 ‘워터프런트’가 어떻고, 이 영화에 나오는 말론 브란도가 어떻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죽었겠는가. 소년기의 상처는(!) 오래가는 법이어서, 40년도 더 된 그날 그 사건의 충격과 여진(餘震)으로 오늘 이 글을 쓴다. 브란도의 타계 소식을 듣고 나서 패트리샤 보스워스의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말론 브랜도』(푸른숲, 2003, 351쪽, 1만4000원)를 읽었다. 나를 매혹시킨 그의 영화들 못지않게 책을 통해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 꽤 괜찮았다.

반항은 그의 ‘타이틀백’이었다. 제임스 딘이나 엘비스 프레슬리나 당대의 ‘앵그리 영 맨’들은 일찍 죽은 탓도 있겠지만 우리 가슴에 영원히 ‘영 맨’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대부’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브란도는 턱시도 신사로 기억되지만, 왕년의 그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폭주에 몰두한 ‘비트 제너레이션’ 반항아였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후에도 그의 턱을 부숴버리고 싶다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한테는 평생 ‘마마 보이’어리광을 부렸다. 이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겸해 그는 일생 동안 정신 치료를 받는다. 뒷날 출세해서는 “어려서부터 달랐어”식으로 미화되었지만, 그의 학교 생활은 결석·낙제·퇴학으로 점철됐다. 미성년자들은 이 부분을 읽지 말도록!

출발은 연극이고, 브란도는 타고난 광대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 역을 찾던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브란도라는 사람에게서 신이 주신 스탠리를 발견하고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87쪽)라고 친구에게 알렸다. 엘리아 카잔이 연출을 맡았던 이 연극은 뒷날 카잔 감독에 브란도 주연으로 다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보다는 연극이 진짜라는데, 역자 서문에서 고명섭은 “전 시대의 연극을 정점에서 구현한 사람이 로런스 올리비에였다면, 새 배우 말론 브란도는 올리비에 시대가 지녔던 엄격성·정통성·명확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고 썼다. 클래식 무대의 전범(典範) 같은 올리비에의 연기를 무지무지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만저만 유감이 아니나, 그 산산조각의 반항이 어떤 것인지는 무척 궁금하다.

나는 배우를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배우가 하는 대로 놔두는 감독도 있는 모양이다. 배우 내면의 고통스런 의식(意識)을 일깨워 즉흥으로 표현하는 ‘메서드 연기’는 작중 인물과 배우의 정서가 일치하는 탁월한 장점이 있단다. “트로마(trauma)를 뽑아내 드라마로 바꿔라”(106쪽). 카잔은 배우들한테 그렇게 주문했다. ‘워터프런트’에서 브란도는 정확히 그 기대에 부응했고, 카잔은 “그것은 내가 감독한 것이 아니었다”(185쪽)고 술회할 정도였다.

‘대부’는 신화가 됐다. 제작사 패러마운트는 처음에 브란도를 제치려고 했으나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이 졸도까지 하면서 설득하는 바람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출연료 100만달러 수준의 배우에게 5만달러 지급, 아카데미상 수상자한테 스크린 테스트 요구 등 아주 모욕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브란도는 기꺼이 모욕을 감내하고 신들린 듯이 연기했다. 감독은 막판까지 걸쭉한 싸구려 소설을 컴컴한 방의 사내들 영화로 바꿔놓았다며 실패를 자책했으나 결과는 대박이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살벌한 ‘비즈니스’를 같이 지키려는 대부의 연기는 바로 미국의 위선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지적은 맞는 말인가.

그의 반항은 여전했으나 감명은 옛날 같지 않았다. 기막히는 연기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면서 나도 정말 토하고 싶었다. 성과 윤리의 타락이 특별히 새삼스런 일도 아닌데 뭐 이렇게까지 야단스럽게…. 영화와 현실의 오버랩은 배우에 대한 관객의 예의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말론에게 섹스는 초콜릿을 먹거나 아스피린을 삼키는 것만큼의 의미밖에 없다”(77~78쪽)거나, 행여 여기 인용했다가는 큰일날(?) 노먼 메일러의 코멘트(299쪽) 따위는 어른들도 읽지 마시도록!! 브란도의 탄식처럼 “연기는 부랑아의 삶”(255쪽)일 뿐인가.

‘지옥의 묵시록’이 뛰어난 반전(反戰) 영화라고? 반전으로는 함량 미달이고, 영화로는 기대 이하였다. 그의 정치로 가보자. 브란도는 “배우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프로이트·간디·마르크스…이런 사람들이 중요하다”(335쪽)고 외쳤다. 그래서 흑인 인권 데모에 참여하고, 미국 영화 산업이 인디언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대부’의 오스카상 수상을 거부한 것일까? “나는 한번도 할리우드를 존경한 적이 없다. 할리우드는 탐욕·허욕·사기·우둔의 상징이다”(145쪽).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세하고도 그는 할리우드에 이렇게 반항했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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