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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자장면 33인분 요즘은 음료수 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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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샵 다이소. 전체 물건중 75% 정도가 1000원 이하다. 지난해 서대문구 영천시장점 모습.

이코노미스트 “한 달에 1000원씩 보내줬어요.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담배 한 갑이 10전, 냉면이 15전 할 때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3000만원 정도 되는 큰돈이죠. 인사동에 집 한 채를 사고 남는 돈이니까요.” 작고한 협객 김두한이 1970년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일제시대 회고담 중 일부다.

1000원의 가치 #소주 한 병 값 1000원 넘어섰지만 라면·지하철 기본요금은 아직 1000원 미만 #지령 1000호 특별기획(4)

당시 경쟁자였던 일본인 하야시가 “자기 구역을 침범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보내줬다는 돈의 액수가 1000원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행권 ‘원’과는 비교하기 힘든 식민지 땅에서 발행된 조선은행권의 액면이긴 하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집에서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모두 취해 있었고, 돈은 천원이 없어졌고,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버렸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고…” 세 명의 사내가 중국 요릿집에서 먹고 마신 음식 값이 1000원이었다는 얘기다.

소설 내용 대로라면 더욱이 ‘아주 비싼 걸’ 시켰고, 그것은 ‘통닭과 술’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 세 사내가 양품점에서 각자 고른 ‘알록달록한 넥타이’ 값이 600원이다. 한 개에 200원꼴이니 1000원이면 5개를 살 수 있는 셈이다. 당시 극장 요금은 한국 영화 55원, 외국 영화 70원 안팎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소설 제목대로 불과 45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소설 속 주인공은 1000원으로 지인들에게 한턱을 내고 있는 것이다. 1000원의 가치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얼마나 큰 편이었는지 이런 일화도 있다. 아동서적 전문 출판사 예림당의 나춘호(67) 회장은 언젠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60년대 비싼 요리로 ‘한턱’ 가치

“1973년 출판사를 만들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박목월, 윤석중 등 당대 쟁쟁한 문학가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원고를 청탁했다. 원고지 매당 1000원.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조건이었다.”200자 원고지 1매당 기준일 터인데 요즘은 1만원을 준다 해도 ‘놀랄 만한’ 일로 치부하지 않을 듯싶다.

그랬던 1000원의 가치는 세월이 흐르면서 하락에 하락을 거듭한다. 세간에는 이런 말도 나돈다. 1000원으로 “1970년대에는 가방을, 1980년대에는 휴지를, 1990년대에는 필통을 살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무엇을 살 수 있을까? 대략 1980년대를 고비로 1000원에 살 수 있는 물건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앞에서 중국집 얘기가 나왔으니 대표적 음식인 자장면 값을 예로 들어 보자. 몇 년 전 공개돼 화제가 됐던 ‘어느 주부의 40년 가계부’에 따르면 자장면 값은 1972년에 30원이었다. 10여 년이 흐른 1983년 자장면 값이 1000원 고지에 등정한다. 이후 1991년 2000원, 1998년 3000원, 2000년대에 4000원으로 올라 연거푸 1000원 한 장씩을 더 내게 만든다.

1960년대에 자장면 값은 15원 수준이었다. 라면 값의 변천사도 1000원의 가치를 가늠해 보기에는 유용한 잣대가 된다. 라면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 중 하나다. 라면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63년 9월이다. 닭기름으로 튀긴 삼양식품 제품으로 1봉지(100g)에 10원이었다.

그 후 1970년 20원, 1978년 50원, 1981년 100원이었다. 1981년에 곰탕은 1200원, 냉면 1300원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싼값이다. 그 후 1990년 200원, 2007년 650원, 2008년 750원 등으로 값이 올랐지만 여전히 1000원 미만이다. 물건 값 싸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충주 무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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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당시의 1000원권 지폐. 14장을 건네야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먹을거리 장터는 “싸고 푸짐하다”는 소문이 근동에 파다해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몇몇 식당에 걸려 있는 ‘차림표’를 훑어본다.

칼국수 2000원, 콩국수 2000원, 된장국 2500원, 청국장 2500원, 육개장 3000원, 갈비탕 3000원 등이다. 어떤 만두전문집에 1000원 가격표가 드물게 눈에 띈다. 김치만두 1인분(10개)이다.

또 다른 충주의 ‘전통충의시장’ 골목. 시장 이름 앞에 ‘옛 장터의 훈훈한 정이 살아 있는’ 곳으로 강조한다. 여기서도 메밀전병, 수수부꾸미 정도가 1000원이다. 동부전, 메밀전은 여기에 500원을 더 보태야 먹을 수 있다. 메뉴판에 나란히 쓰여 있는 순대국밥은 4500원, 두부전골은 5000원으로 값이 훌쩍 뛴다. 아무리 싸다지만 1000원짜리 음식 구경하기가 무척 힘들다.

시내버스·지하철 1회 타는 수준 전락

현재 쓰이는 1000원권 지폐 최초 발행 시기는 1975년이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2월까지 쓰인 1000권이 있지만 화폐 단위가 ‘환’으로 바뀌기 이전의 구권이다. 최근 5만원권이 나오기 전 최고액권인 10000원권은 1973년에, 5000원권은 1972년에 세상에 먼저 나왔다.

1000원권 지폐가 나오기 전에는 그 자리를 동전이 대신했다. 1970년에 탄생한 100원짜리 10개로 계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500원짜리 단 2개로 1000원 계산을 끝내려면 1982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요즘 1000원으로 무엇을 살 수 있을까? D매장은 국내 ‘1000원 숍’의 대표격이다.

작년까지 ‘1000원이 가치 있는 곳’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던 곳이다. 당연히 1000원짜리 물건이 즐비하다. D매장 홈페이지 ‘상품 소개’란만 뒤져봐도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예를 들면 ‘생활 용품’ 중 ‘청소 용품’란 첫 번째 목록 15가지 중 재떨이, 걸레, 청소솔 등 10가지나 된다.

‘문구 용품’ 중 ‘일반 문구’ 첫 번째 화면은 15가지 상품 모두 1000원짜리다. D매장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대략 2만여 가지. 그중 1000원짜리 상품은 절반을 넘는다. 요즘 물가 수준을 감안할 때 1000원짜리 상품을 소비자 앞에 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D매장은 ‘저렴한 가격’은 기본이고 ‘우수한 품질’의 ‘다양한 상품’을 또 다른 특징으로 내세운다.

이 가격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이 회사 안웅걸 홍보이사는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한 결과”로 정리한다. 1000원짜리 상품을 주력으로 이 회사의 작년 기준 연간 매출액이 2200억원을 넘어섰다. 화폐 가치를 비교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상품 중 하나가 쌀이다. 쌀은 우리 민족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주식이다.

또 역사 속에서 쌀은 베와 함께 사실상 화폐 역할을 대신하던 때가 있었다. 물물교환을 할 때는 물론 근대 화폐가 등장하기 전에는 자주 그랬다. 그런 만큼 쌀값은 사실상 물가의 척도 같았다. 역대 서울시 소비자물가 통계를 들춰보면 쌀값을 중심으로 1000원의 가치 변화 일단을 읽을 수 있다.

1966년 80㎏ 쌀 한 가마 값은 3000원 수준이었다. 단순 계산하면 당시 1000원이면 쌀 25㎏ 남짓을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1972년에 가서야 쌀 한 가마 값이 1만원이 된다. 요즘 쌀 20㎏ 한 포대 가격은 대략 4만원 안팎이다. 따라서 1966년 당시 1000원의 가치는 쌀값 기준으로 요즘 돈으로 5만원 이상이었던 셈이다.

1970년에 밀가루 또한 1포대(22㎏)에 773원으로 1000원 안쪽이었다. 당시 1000원이면 무 6관(한 관 160원)이나 배추 4관 반(한 관 222원)을 살 수 있었다. 40원짜리 세탁비누(450g)는 무려 25개를 사는 것이 가능했다. 또 쇠고기 2근(600g, 500원) 값이었다. 1964년 쇠고기 1근 값 129원에 비하면 근 4배가량 오른 가격이었다.

그래서 1970년까지는 1000원이면 식구들에게 고깃국으로 포식을 시킬 수 있었다.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1965년에 8원이었다. 1970년대에는 15~80원 사이였다. 1980년대는 어른 기준으로 120원부터 시작해 200원 미만이었다. 지금은 900원(교통카드 사용 기준)이다.

현금으로 요금을 내면 1000원이다. 그러니까 1000원이면 1965년에는 시내버스를 125회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한 번밖에 타지 못한다. 지하철 요금의 변화도 엇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1974년 서울역~청량리 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을 때 기본 요금은 30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1년 100원, 1993년 300원, 1999년에는 500원으로 올랐다. 현재는 900원이다. 1000원으로 1970년대 중반엔 33번, 1980년대 초에는 10번, 1990년대 후반에는 2번, 최근에는 1번 정도 지하철 타는 것이 가능한 셈이다.

1990년대 중반 담배 1갑 1000원 시절 마감

택시 기본요금(2㎞당)도 서울 기준으로 1966년에 60원, 1970년에 90원 수준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택시 기본요금이 1975년에 200원, 1980년에 600원으로 계단 오르듯 올랐다. 1988년 당시 등장한 중형택시 기준으로 800원이었다가 1994년에 드디어 1000원이 된다.

1998년에 1300원, 2005년에 1900원으로 올랐던 택시 기본요금은 올해 6월부터 2400원으로 인상됐다. 모범택시 기본요금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4500원을 유지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1998년부터는 1000원 한 장으로는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택시 탈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이다.

술과 담뱃값의 변화 추이도 돈의 가치를 재는 데 빠질 수 없는 척도다. 술, 담배는 매니어 층이 늘 있게 마련이어서 생활필수품 중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그 때문에 ‘물가 관리’라는 명분으로 정부에서 사실상 값을 정해주기 일쑤였다. 더구나 담배는 오랫동안 정부 전매품이었다.

그런 만큼 술, 담배의 가격은 1000원의 가치 변화를 살펴보는 데도 나름대로 대표성이 있다. 한국인에게 가장 대중적인 술은 누가 뭐래도 소주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 조정도 여러 차례 이뤄졌고, 최근 이름과 종류 또한 다양해졌다. 또 소주의 유통 메커니즘은 독특하다. 권장 소비자가가 없다.

제조업체에서 출시하면 매장에서 적당히 이문을 덧붙이는 식이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그 값을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상징적 상품을 콕 찍어서 살펴보면 값의 변화 추이에 대한 큰 흐름은 읽을 수 있다. 요즘도 소주 시장의 양대산맥으로 통하는 C제품도 그중 하나다.

2홉들이 병소주의 출고가 기준으로 1968년에는 55원 수준이었다. 100원을 넘어선 때가 1976년 말로 105원이었다. 213원으로 200원대를 넘어선 것은 1981년에 들어서였다. 1990년이 되어서야 300원이 되었다. 1998년 제품명이 바뀌면서 단숨에 510원으로 뛴다. 2000년대 들어서 2002년까지는 600원대를 유지하다 2003년에 740원이 된다.

이듬해인 2004년에 800원대에 올라섰고, 2008년 888원을 기록한다. 들쭉날쭉이긴 하지만 소주 1병의 소비자 가격은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략 500원이면 살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800원 정도였다. 하지만 2004년을 기점으로 1000원 한 장은 있어야 소주 1병을 살 수 있게 됐다.

그 소주를 요즘 편의점에서 구입하려면 1450원을 주어야 한다. 구멍가게에서 아무리 싸게 사도 1200원 이상이다. 물론 음식점에서 받는 소주 값은 이와는 별개의 문제다.

1000원이 ‘하찮은 돈’ 여전히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 필터 담배 ‘아리랑’(1958년 최초 발매)은 1976년 단종될 때 1갑에 150원이었다. 1965년에 나온 ‘신탄진’은 최초 발매가가 50원, 1968년에 첫선을 뵌 ‘청자’는 100원이었다. ‘거북선’은 1974년 첫 발매 당시는 200원이었다. 500원으로 값이 오른 것은 1989년부터다.

1980년대 최고 인기였던 ‘솔’은 1980년 태어날 때 450원이었다. ‘디스’는 1990년대를 지배한 최강자였지만 시초가는 900원이었다. 우리나라 담배 중에서 최초의 1000원짜리는 1995년 국내에 시판된 ‘오마샤리프’였다. 이 담배는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의 수출용으로 탄생 배경이 남달랐다.

물론 그 이전에도 1000원짜리 담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방’이 그것이다. 1974년 처음 시판할 때부터 100g 포장에 1000원이었다. 그러나 이 제품은 탄생부터 귀족 같은 존재였다. 당대 멋쟁이들이 피우던 파이프용 입담배였기 때문이다. 당시로는 너무 비싸다고 여겼는지 1979년 10월부터 2년 가까이 50g으로 포장해 판매했다.

대중용 궐련 중 최초 시판가 1000원짜리는 1996년에 나온 ‘심플’이었다. ‘디스’ 또한 그해 1000원 고지에 올라섰다. 1996년 말 시판한 ‘엣세’는 최초가가 1300원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이 피우는 담배 1갑에 1000원 시절이 사실상 마감된 것이다. 2000년에 나온 ‘리치’는 1600원으로 훌쩍 뛴다.

2004년 말 ‘디스’는 1500원에서 2000원으로 인상된다. 같은 시기에 ‘엣세’ ‘더원’ ‘레종’ 등은 일제히 2500원이 되었다. ‘씨가 넘버 1’ 등을 비롯해 담배 1갑 2500원 시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1000원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 일로를 걸었다.

경제 성장과 궤를 같이해 전반적으로 물가가 상승한 탓이 가장 크다. 한편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점진적으로 올라가면서 1000원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평가도 점차 낮아졌다. 그렇다고 1000원이 정말 하찮은 돈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집이나 회사 근처에 흔히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보라.

1000원짜리는 물론 거스름돈을 받아야 하는 상품이 아직도 적지 않다. 오렌지 주스 등 작은 병에 담긴 웬만한 음료는 1000원이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콜라, 사이다 같은 캔 음료도 800~900원대가 대부분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이른바 ‘하얀 우유’(200mL 팩 포장)는 700원대다.

초코, 바나나, 딸기 우유 등 특수 성분 첨가 제품이라야 1000원을 받는다. 과자 중에 비스킷류도 대체로 1000원 미만이다. 동네 재래시장에 가면 요즘도 1000원을 내밀면 건네받는 오이나 가지 등 채소류는 거의 한 보따리의 양이다. 대형 마트나 심지어 백화점에서도 ‘특판 상품’ 중에 1000원짜리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1000원의 가치가 옛날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찮은 돈’은 여전히 아니다. 더구나 ‘껌값’은 더욱 아니다. 흔히 찾는 가장 작은 포장의 껌값은 500원이다. 1000원이면 2통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윤석진 편집위원·gra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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